위대한 자와 환상을 좇는 자의 경계에서
F. 스콧 피츠 제럴드, 『위대한 개츠비』(문학동네, 2009)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한 번씩은 죽어야한다. 시간이란 삽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 파묻고, 나만의 장례식을 치러야한다. 이런 애도 과정을 거쳐야 첫사랑의 환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떠나간 첫사랑을 죽이지 못한다면? 평생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살면서 남은 인생을 쥐락펴락한다면? 여기 첫사랑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평생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다. 바로 『위대한 개츠비』의 제이 개츠비다.
소설은 닉 캐러웨이란 인물을 통해 전개된다. 1922년 롱아일랜드 웨스트에그에 살고 있는 닉은 호화로운 별장에 거주하는 이웃 개츠비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옥스포드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는 개츠비는 비밀이 가득한 사나이다. 이 베일에 싸인 백만장자는 토요일마다 떠들썩한 파티를 열어 많은 손님을 초대한다. 파티에 초대 받아 참석한 후 개츠비와 우정을 쌓게 된 닉은 자신의 사촌 데이지와 개츠비가 옛 연인 사이였던 것을 알게 된다. 데이지는 가난한데다 전쟁터에서도 돌아오지 않는 개츠비를 잊은 채 부유한 톰과 결혼한 상태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 톰은 정비공의 아내와 바람을 피고, 때마침 개츠비와 재회하게 된 데이지는 잊혔던 사랑의 감정을 되살리게 된다.
제이 개츠비는 어떤 의미에서 작가 피츠제럴드와 많이 닮았다.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처럼 물질적 풍요로움과 사랑의 환상을 찾아 헤맸지만 그럴 때마다 실패했다. 1915년 피츠제럴드는 지네브러란 미모의 여성과 사귀었지만, 재산에 따른 사회적 신분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결국 헤어지고 그녀는 청년 재벌과 결혼한다. 피츠제럴드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지네브러를 모델로 삼은 데이지란 인물을 창조한다. 또한 닉은 자신의 이웃 에드워드 풀러를 모델로 삼았으며, 개츠비의 후견인으로 그를 일약 신흥부자로 만들어준 울프심이란 인물은 1920년대 뉴욕 폭력계를 주름잡던 아널드 로스스타인을 모델로 삼았다. 이렇듯 작가와 주변 사람들의 삶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는 출간 당시 잘 팔리지 않아 그가 사망할 때까지도 창고에 재고로 남아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고전이자, 영화로까지 각색된 작품이지만, 아이러니하게 피츠제럴드한테는 ‘상처’로 남은 작품인 셈이다.
작품이 출간된 시기가 1925년이듯, 소설은 1920년대의 미국 사회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1929년까지 경제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사회는 톰의 저택이나 개츠비의 파티처럼 외면은 화려하고 고상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극심한 빈부격차와 계급간의 대립, 사치스런 향락이란 악성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이런 시대상은 소설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톰 뷰캐넌은 전망 좋든 대저택에 거주하고 으리으리한 자동차를 몰고 다니지만, 자동차 정비공인 조지 윌슨은 ‘쓰레기 계곡’이라 부르는 쓰레기 처리장 근처에 살며, 호화롭고 낭만적인 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는 삶을 산다. 심지어 부자들 사이에도 대립이 있다. 대대로 부를 세습해온 부자들과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신흥세력의 갈등이다. 부를 세습해온 부자들은 신흥부자들을 경계하고 경멸한다. 소설에서 톰 뷰캐넌이 전통적인 부자의 전형이라면, 개츠비는 신흥부자로 상징되는 인물이다. 이들은 사는 곳은 만(灣)이라고도 부르기 뭣한 작은 만을 경계로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로 나뉜다. ‘이스트에그’에는 톰처럼 부를 세습한 자, ‘웨스트에그’엔 개츠비처럼 벼락부자들이 모여 산다. 톰과 개츠비는 지리적 배경뿐만 아니라 가치관, 가문, 성격, 취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길항한다.
그러나 소설은 당시의 사회상과 물질적 성공만을 다루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개츠비를 통해 이룰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 중 하나를 말하고 있다. 실패한 첫사랑이 평생토록 생각나는 이유는 그 대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다운 환상으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영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은 과녁을 향하여 나아가는 화살 같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자신이 쏜 화살 같은 존재다. 팽팽히 당긴 활시위를 놓친 순간, 화살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츠비는 자기가 쏜 화살을 잡으려고 한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부정한 방법까지 마다하며)막대한 돈을 모아 대저택을 사고 파티를 연다. 결국 잠시나마 데이지를 붙잡았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그가 잡은 건 ‘사랑’이란 화살이 아닌 ‘환상’이란 독화살이었다.
“오래도록 품어왔던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환상의 생생함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P121)
현실적으로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첫사랑을 다시 찾으려는 개츠비 시도는 어리석고 무모하며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톰과 데이지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의 이중적인 모습과 비교할 때 개츠비의 헌신적인 모습은 오히려 숭고하게 느껴진다. 또한 피츠제럴드는 닉이란 인물을 통해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환상과 꿈을 갈망한 개츠비의 태도가 옳았다고 말한다. 당시 부조리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했던 시대 속에서 그래도 삶을 영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건 개츠비가 추구했던 환상뿐이라고 소설에서 말하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의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한다. “컴퍼스로 그린 듯한 붉은 원이 물 위에 생겼다.”(P202) 죽는 순간까지 이룰 수 없는 것을 갈망한 그의 신념은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연상시킨다. 태양은 겉으로는 찬란하게 빛나지만, 사실 그 속은 영원히 뜨거운 상태로 죽어간다. 개츠비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많은 것을 얻었지만 그 때문에 죽음을 맞는다. 과연 소설 제목처럼 개츠비는 위대한 사람일까? 환상에 사로잡혀 자신을 파멸시킨 사람일까? 『위대한 개츠비』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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