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토요일에 아주 재밌게 보고 왔습니다.
놀란 감독은 초기작부터 시간을 가지고 변주를 시도합니다. 메멘토를 처음 봤을 때 선명히 각인됐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 후, 인셉션과 베트맨시리즈 그리고 인터스텔라를 거치며 이번 덩케르크에서 그 스킬이 완성된 것 같더군요.
덩케르크는 전쟁영화 특유의 문법인 잔혹무도한 적군, 스펙터클한 전쟁씬, 독보적인 영웅 같은 것이 없어서 장르적 재미가 덜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스 짐머의 음향과 아이맥스로 구현되는 광활한 화면이 우선 압도적이고 3개의 다른 시간대가 한 시점을 향해 각기 다른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수렴되는 그 자체가 새로운 재미었습니다.
앞서가는 시간대에서 뿌려대는 떡밥을 뒤쫒아오는 시간대에서 맥거핀 없이 회수해 가는 것도 이물감 없는 거의 완벽한 편집으로 구현해내서 떡밥 회수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3개의 다른 시간대와 그에 맞는 각기 다른 화면 구성 또한 눈여겨 볼 만 합니다. 공중에서의 부감샷, 바다에서의 수평선, 육지에서의 디테일한 전쟁의 참극. 그리고 1인칭으로 보여준 장면을 3인칭 타자의 시점으로 다시 본다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홍상수 감독이 주로 쓰는 차이와 반복을 차용하면서 같은 장면을 다르게 연출하는데 가이리치 감독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베럴즈를 접했을 때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또한 겨울 바다의 차갑고 습한 회색빛 전경이 화창한 바다와 공중의 화면과 대비되면서 아군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감정과 사지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연합군의 절박함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영화적 장치와 극을 끌고가는 묵직한 힘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척 몰입이 잘 됐습니다.
독일군이 정면으로 나오는 것은 전투기씬이 거의 유일하지만 몇 대의 전투기에 수 십만의 군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장면은 굳이 백병전을 하지 않더라도 공포감을 주기에는 부족한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수장되거나 수장될 뻔 한 장면이 여러번 나오는데 육지의 적과 바다로 둘러싸인 백척간두의 위태로운 연합군의 상황을 더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덩케르크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을 궁지로 몰아 넣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수 십만의 연합군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도덕성과 윤리입니다.
집단의 통념적인 윤리의식을 도덕성으로 칭한다면 프랑스군을 배제하는 영국군, 승선한 사람들과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의 노골적인 감정의 갈등, 부상당한 동료를 팔아서라도 살고 싶어하는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동료 군인들을 보면 전쟁이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넣을 수 있는지 굳이 유혈이 낭지하거나 인육을 뜯어 먹는 장면이 없어도 공포가 느껴집니다.
개인의 윤리의식 또한 처참히 무너집니다. 영국군으로 변장해 물이 들어차는 배에서 연명하던 프랑스인을 가장 먼저 배제하려는 영국인들(심지어 그 프랑스인은 수몰 직전의 배의 해치를 열어 영국군들을 구하기까지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가장 약해보이고 어수룩한 사람을 다음 희생양으로 지목하는 개인들. 가까스로 마크 라이런스의 배에 오른 킬리언 머피가 덩케르크로 향하는 배를 돌리려다 결국 다른 희생을 만들고야 마는 장면 등 결국 도덕과 윤리는 이분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윤리의식이 집단 발현된 것이 도덕성이라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인물들의 의식은 독일군과 연합군, 자국과 타국, 더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강자와 약자로 세분화 되면서 무리지어 편가르기를 하며 서로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이러한 메카니즘은 비단 덩케르크에서 뿐만 아니라 다크나이트의 두 척의 배가 나오는 유명한 시퀀스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하지만 놀란 감독은 이러한 이기주의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자기희생이라는 것도 여러 작품을 통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트맨이 폭탄을 지고 바다로 나가는 장면, 다크나이트에서 배 안의 죄수들이 시건장치를 버리는 장면, 덩케르크에서 톰하디가 연료가 바닥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싸우는 장면과 마크 라이런스가 끝까지 배를 운항하는 장면 등 공동체는 결국 누군가의 희생의 대가로 지켜진다는 것이죠.
그리고 임무에 실패하고 퇴각한 군인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의 멸시, 천대와는 달리 그들을 칭송해 주고 고생했다며 다독여 주는 국민들은 따뜻한 음료와 담요, 기차 창문 사이로 전해지는 맥주 두 병처럼 패잔병들에게 위로와 해갈을 줍니다.
공동체는 나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집인 것이고 공동체는 아무리 못난 사람이도 끌어 안을 수 있는 거대한 산 같은 존재여야 한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또한 사면초가의 군인들을 구하는 것은 해군의 구축함이 아니라 사람들의 조그마한 어선과 요트인 것만 보더라도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십시일반 힘을 모아 결성된 공동체만이 전쟁을 나아가서는 사회문제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감독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덧붙여 베트맨과 덩케르크를 통해 세상을 이끌고 지키는 것 또한 한 명의 완벽한 영웅이 아닌 특출날 것 없고 어쩌면 결점 투성이인 개인들이라는 것을 감독은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덩캐르크도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신파와 국뽕(?)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타 전쟁영화들 보다는 훨씬 담백해서 거슬리는 정도는 아닙니다. 사연을 팔지도 않으며 전우를 대신해 총을 맞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과장 없이 전쟁을 목도하고 꾸밈 없이 전달해줄 뿐이죠.
저는 원래 영화를 볼 때 감독이나 출연진 이름 정도만 확인하고 보는 편입니다. 덩케르크 역시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제가 영화에 대해 말씀드린 것에 오역이나 과장 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놀란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 입장에서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라고 생각한 것 위주로 글을 썼고 이런 시각도 있구나라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품에 대해 평을 하는 것이 처음이고 이동하는 기차에서 쓰는 것이라 문장이 모호하거나 주술이 안 맞거나 맞춤법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 이점 양해 바랍니다. | |
|
등록안내
0
1
어젯밤어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