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유령 할 그리고 환

수수께끼와도 같았다. 출생과 죽음. 그 둘 중의 하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야 마땅했다. 자신만의 안락한 궁전을 빠져나와 빛의 세상과 만났을 테지만 그때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핏기 어린 작은 손을 움켜쥐고 발을 동동거리며 앙앙거렸겠지. 어머니로부터 분리된 두려움이거나 세상에 나온 신호탄이거나. 출생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할 자신의 죽음에 관한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승을 떠도는 유령. 할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어야 했다. 까마귀 고기를 먹은 것도 아닌데 그 상황을 떠올리자면 할은 머릿속이 까맣게 먹어 들어갔다. 머리만 지끈거렸다.

유령으로 언제까지 이승에 머물러야만 되는 걸까. 할이 청승을 떨자면 환의 표정은 굳어졌다. 이승에서의 십수 년 세월을 환과 함께 보냈다. 꼬맹이였던 환은 금방 청년이 되었다. 스물여섯에 멈춰 선 할을 앞질렀다. 과거엔 삼촌이요, 형이었는데 요새는 걸핏하면 환 자신이 형인 양 굴기도 한다.

얄궂은 상황이지만 할의 존재를 알아봐 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환과의 만남은 기적에 가까웠다. 어쩌면 필연적인 우연의 운명.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 지 백 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할은 이승에 발목 잡혀 있다.

할은 손님의 커피 주문을 받는 환을 바라봤다. 자신이 이승에 남아있는 이유가 환 때문은 아닐는지. 그러다 할은 고개를 내젓는다.

환은 자신의 외로움과 불행을 버텨낸 아이일 뿐이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유령으로 산 사람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결계가 풀린 혼란한 세상에 있는 기분이다. 저승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친구를 염원하던 환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할이 알아야 할 자신의 죽음 때문은 아닐까. 할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일 뿐이다. 죽음은 자신의 뇌를 아무리 헤집어도 발견할 수 없다. 환이 어른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죽음을 잃어버린 자신이 몸통만 있는 물고기 같다는 생각을 할은 종종 했다. 머리와 꼬리가 없는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쳐 다닌다면 그처럼 괴기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너덜너덜해진 몸통이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 소름이 돋는 일이다. 그럼에도 할은 또렷이 기억했다. 바다 건너 도쿄로 가기 위해 배에 오르던 그 순간을. 살아생전 할이 본 기억의 끝은 부산의 너른 앞바다다.

도망치듯 쫓겼다. 목숨 하나를 얻었고 진정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우습게도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꿈이라면 꿈이었고 필생의 염원이었다.

“할은 뭐 했어?”

고수레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환이 물었다.

- 이런 몸으로 하긴 뭘 해.
“유령이 되기 전에 뭐 하던 사람이었는지 묻는 거잖아.”

할은 환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몰라. 지금은 내가 산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해.

할은 힘없이 말했다.

비밀이랄 것은 없지만 괴기스런 자신의 생에 대해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생으로 가득했던 날들을 떠올리자면 죽어버린 할의 심장이 요동치는 듯했다.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때였고 서구 열강들이 세계 곳곳을 점령하기 위해 앞을 다투던 시대였다. 양반 상놈 할 것 없이 평등한 천지개벽의 세상이 열릴 것이다. 누구는 그 변화의 물결에 재게 올라탔다. 스트라이프 무늬의 회색빛 바지. 몸에 꽉 맞는 조끼에 검정색 베레모. 나름 감각적인 패션을 구가한 할 또한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분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할의 육신은 진토 된지 오래다. 벽에 시신이 묻힌 것을 보면 비명횡사한 객이고 황천에 있어야 할 황천객이다. 할의 나라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 대한 제국이 탄생했고 제국은 세계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할이 살던 19세기는 이미 오래전에 종료를 고했고 유령 할의 눈앞에는 21세기가 펼쳐져 있었다. 어린 환이 할을 붙잡고 있어서라는 핑계도 이제는 통하지 않았다. 피어보지도 못한 할의 사망 당시의 나이를 환이 앞질렀다. 자신의 영혼을 불러낸 꼬마 환은 할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환은 할의 봉인을 해제시켰고 할은 영혼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조선인인 자신의 시체가 어쩌다가 도쿄의 견고한 건물 벽에 발려졌는지 할은 알지 못했다. 카페의 강화 유리창 너머에 시선을 두고 있던 할은 뼛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환은 기웃기웃한 동작으로 할의 기색을 살폈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어? 오늘따라 어째 좀 수상쩍네.”
- 그냥, 답답해서….

할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먹지 못하니 음식을 탐하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있어 교육을 걱정하는 것도 아니고, 바람난 애인이 있지도 않잖아. 할이 답답할 일이란 게 대체 뭐야?”
-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싶어서 그런다.
“왜에? 유령으로 사는 게 만만치 않아?”
- 이승에 좀 오래 있었어야 말이지.

할은 자신의 꼴이 너무도 한심했다.

환이 어릴 때는 그나마 나았다. 유령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몰랐으니까. 자신의 곁에서 속살거리는 환을 보자면 할은 자신이 유령임을 잊었다. 환을 따라 도쿄에서 한국으로 건너왔을 때에는 감격했다. 환과 있는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환은 더디지만 새로운 환경과 생활에 적응해갔다. 환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 외에 딱히 다른 일은 없었다. 그래도 살만했다. 유령의 삶이라는 게 말 안 되는 줄은 알지만 할은 산 사람들 틈에서 산 사람처럼 지냈다. 솔직히 괜찮았다. 그러나 성인이 된 환을 보고 있노라면 저승에 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이 분주한 일상을 보내노라면 할은 자신이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전락한 것만 같다. 환은 이제 친구를 염원하던 그 옛날의 꼬맹이가 아니다. 어엿한 청년이 되었고 자신의 일도 척척 알아서 했다. 환이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분명 기뻐해야 될 일이다. 환이 잘 지내면 지낼수록 할의 상심은 부작용처럼 깊어갔다.

심심하고 무료한 무의미한 날들이 흘러갔다. 할 일이 없는 사람 아니 유령. 고독의 순간에 할은 자신에 대해 파고들었다.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콘크리트 벽에 몸이 발린 것처럼 자신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매끈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미궁인 자신의 죽음에 대해 파고들자면 할은 머리가 터질 듯했다.

“기운 좀 내. 그렇게 할이 시무룩해 있으면 내 기분이 젖은 빨래 같다고.”
- 유령 인생에 신나는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지.

환이 무슨 말을 해도 할은 시들하기만 했다.

“기다려봐. 할이 반길만한 사건이 생길지 또 모르잖아.”

환은 조금이나마 할의 기분을 풀어주려 마음을 썼다.

- 박 씨를 물어다 준 제비처럼 의뢰인이 사건을 물고 올까? 그러면 엿 같은 이 기분이 좀 사그라지려나.
“그럴 거야. 제발 낙담한 얼굴로 그렇게 있지 말라고.”

할은 시무룩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가뭄의 채소들처럼 시들한 미소였다.

그리고 다음날, 할은 폭풍전야 같은 아침과 마주했다. 카페 앞 전깃줄에 올라앉은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어댔다. 따분한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나 싶던 차였다. 난데없는 까마귀의 등장에 할은 마음이 시끄러웠다.
아침부터 까마귀가 울다니 재수가 없으려나. 할은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동양에서야 까치가 반가운 손님이지만 서양에선 까마귀가 상서로운 손님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