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읽은 ‘고고한 사람’은 등산 만화입니다.(2015년 작성)

만화의 이론 중에 왜 ‘과장된 인물’이 나오는가에 답은

 “실사의 인물은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에게 자기와 동일시하는 효과가 낮은 데 비해, 일반적인 ‘그’로 파악되는 일반화된 만화의 인물은 자기 동일시가 빠른 시간 내에 일어나게 한다.”랍니다.

이 만화를 읽고 15년간 하지 않던 빙벽등반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 정도로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고고한 사람을 읽고 나서 바로 든 느낌.

‘만화일 뿐인데 난 8000m를 다녀왔다’

주인공 분타로는 사람이 싫고 만사가 귀찮은 인물입니다.

 주인공 분타로가 등반을 시작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자신에게 산을 가르쳐준 선생님이 자기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죽고 난 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산을 오르는 것임을 알고 나서부터입니다.

스스로에게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느끼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른다.

누구에게 도움을 주고,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

그는 타인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거대한 산의 바위의 틈새에 손을 끼워넣었을 때 마치 바위와 자신이 하나가 된 듯 하다며 희열을 느낀다.

거대한 자연의 일부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며, 스스로 자연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비친 모습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것이 아니라,

나에게, 나만의 나를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대사 중)

그의 삶은 전부 등산과 연관됩니다.

 히말라야의 추위를 경험하기 위해 냉동창고에 근무하는 것이나

차를 타지 않고 배낭에 짐을 싣고 일부러 걸어서 출퇴근, 심지어 굶는 훈련까지도요.

그는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 모르는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에 더 집착(또는 집중)하게 되는데 암벽도 솔로, 산행도 솔로, 사회에서도 솔로입니다.

그런 분타로도 인간과의 관계를 맺게 되는데요.

 첫 번째 부류는 그의 산에서의 명성이 자자해지자 그와 줄을 묶는 인물들-K2등반대원들,

 그리고 그의 얼마 안 되는 돈을 노리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세속적’입니다.

K2등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게 된 등반대원들은 훈련 때 전부 죽습니다.

 그 후로 분타로의 산행은 철저하게 ‘단독행’이 됩니다.

여기에서 좀 눈여겨봐야 할 내용이 있는데요.

 책을 읽다 보면 여성과의 성관계를 암시하는 장면이 꽤 나옵니다. ()

 언뜻 보기에는 ‘여자와 관계를 맺으면 산에서 죽는다’는 징크스에 관한 것인가란 생각을 하게 될 정도입니다.

 분타로의 죽은 파트너들은 전부 여자가 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제 선배가 ‘클라이머의 적은 여자야!!’라고 일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 여성 클라이머의 적은 남자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야 한단 말인데..

..그럼 이 만화은 ‘여성 혐오적’인가요? 좀 달리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여성’은 ‘구도의 길’을 걷는 구도자,수행자에게 방해가 되는 이 모든 잡념과 욕심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랄까요.

 분타로에게 등산은 해탈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오로지 정상을 향해 가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솔로를 추구하는 것 같고 고집도 세 보입니다.

 실상은 안 그런 로멘티스트인데도 말이지요...

그런 분타로는 ‘등산 괴물’이 되어갑니다.

 그가 후지산에서 6개월여 혼자 살면서 거울을 보는 장면이 있는데 거울에 비친 괴물의 모습을 보며 울고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괴물)

그를 구원해주는 것또한 ‘여인-하나’입니다.

 후지산에서 구해준 것을 인연으로 ‘등산 괴물’분타로는 그녀에게 ‘계속 같이 있어주세요’를 들릴락말락 수줍게 말하고

결혼을 하고 딸 롯카를 보게 됩니다.

  그후 그의 산행이 단독행이 바뀐 건 아니지만 목적은 바뀝니다.

‘난 하나와 롯카를 위해 살아돌아가겠어’

그의 변심에 산이 화가 난 걸까요. 질투를 한 것일까요.

마지막 산인 K2는 그에게 시련을 줍니다.

파트너를 눈사태로 죽이고 홀로 오르다 하산을 결심하는 그를 괴롭힙니다.

그 시련을 돌파하는 것은 그의 ‘본능’입니다.

 우리 센터에도 보면 손가락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데도 일주일에 4-5번 오시는 분들 적지 않습니다.

 그냥 운동중독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오르고자 하는 본능’이 그들을 센터로 산으로 이끄나봅니다.

분타로도 그의 오르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무의식 중에 벽을 오릅니다.

 마지막 정상에서 웃으면서 삶을 포기하려 하나 그를 살아돌아오게 한 것은 그의 부인과 딸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산을 오르는 단계는 본능, 그리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고자 함은 그렇게 돌아갈 이유가 있어서 아닐까요.

예전의 산에서는 '분타로'와 같은 선배들을 꽤 봤습니다.

등산을 위해, 등반을 위해 자신의 직장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치우는 정도.

그 모습에 우와~했는데 지금의 저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어 '외롭고 높은'그런 산행을 언제 해 봤는지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그게 더 저를 서글프게 만드는군요.

그러나 이 만화를 읽고 대리만족을 통해 상당 부분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도 마음 속의 산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야 이 우울한 세상을 살아갈 원동력이 되니까요.

언젠가는 저도 저만의 8000M를 오를겁니다.

인수봉도 설악산도 8000M라 생각하면 그렇게 될 겁니다.

사족으로 덧붙임:

 이 만화의 특징은 완벽한 디테일에 있습니다.

 등반의 과정이나 장비의 묘사를 보면 이게 그냥 그려진 게 아니구나란 생각이 듭니다.

 (전 그래서 분타로가 썼던 블랙다이아몬드 바이퍼 엑스를 샀습니다. 메스너 텐트나 티타늄 피켈은 돈 더 벌어서..).

그리고 또 하나, 만화의 특징 중 하나인 의성어, 의태어가 없습니다.(슝~쿵~)

 그 이유는 작가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대신합니다.

“어느 무렵부터 나는 의성어를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만화가 컷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림과 템포만으로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진실한 소리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센터는 2층에 산악도서를 갖추어놓고 있습니다.센터장 선생님의 노력으로 이 정도 장서를 갖추어 놓았고 웬만한 산악도서관 부럽지 않을 정도입니다. (자랑..)

 ------------------------------------------------------------

(다른 카페에 2016년에 작성한 글을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