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을 기다려야 걸을 수 있는 봄날의 지리산 서북능선. 눈꺼풀 위에 쌓이는 풍경의 무게가 그저 즐겁기만 했던 길.
푼짱입니다. 늘 먼발치서 바라만 보던 지리산 서북능선을 다녀왔습니다. 바래봉부터 성삼재까지. 부상에서 복귀한 후
가장 긴 거리를 걸었습니다. 금요무박으로 다녀온 터라 등로의 정체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체력이
더 걱정이었죠. 20km 가까이 걸어본 게 워낙 오래전 일이라 걱정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빡빡한
근육통 외엔 특별한 이상 없이 무사완주했습니다.
지리산 서북능선은 유난히 고개가 많습니다. 치(峙)라는 명칭이 많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죠. 치(峙)란 '우뚝 솟다'란
뜻으로 마주 보고 있는 두개의 산이나 봉우리가 가파르게 솟아있어 다소 험준한 느낌을 주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행여 간신히 나은 몸이 또 탈이 날까 조마조마해야 했습니다. 대전자 석회화 건염에서 벗어난지는 한 달쯤
됐지만 그동안 10km 넘는 산행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들머리에서 바래봉삼거리까지 올라가는 지루한 임도길, 팔랑치에서 큰고리봉까지 가는 길이 조금 힘들었지만 나머지
구간은 큰 무리 없이 진행 가능했습니다. 박복한 인생의 살아있는 화석답지 않게 바래봉에서 멋진 일출도 감상했고요.
하늘까지 청명해서 천왕봉을 바라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작년에도 5월에 좋은 날씨 속에서 백무동~천왕봉
코스를 다녀왔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봄날의 지리산을 맘껏 누볐네요.
산행거리 약 20km, 산행시간 10시간 30분(휴식, 식사, 일출대기, 사진촬영 포함)
※ 모든 사진은 1500px로 작업되었습니다. 클릭하면 원본 사이즈로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쯤 강제 리사이징 문제
해결해줄건지 여전히 묵묵부답. 속이 끓다 못해 화가 납니다.
새벽 4시쯤부터 시작하겠거니 했던 산행을 생각보다 30분 일찍 들머리에서 출발했습니다. 피셔님이 말씀하신대로
바래봉삼거리까지 올라가는 임도길이 꽤나 지루하더군요. 그나마 길이 편해서 다행이었습니다.
산악회에서 2가지 코스를 마련했는데요. A코스는 바래봉~팔랑치~정령치휴게소에서 마무리, B코스는 중급자용으로
정령치에서 성삼재까지 가는 코스였습니다. 저는 B코스에 도전했고요. 여차하면 정령치에서 중탈하자 생각했죠.
종주팀은 대부분 바래봉삼거리에서 바래봉 왕복 없이 곧바로 팔랑치로 갑니다. 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예상과 달리
하늘이 너무 맑고 운해도 멋지게 끼어있어 바래봉에 들렀다 가게 됐습니다.
까짓거 뭐 중탈하고 나중에 성삼재에서 역으로 시작하는 코스 있으면 그거 따라서 정령치까지만 가자고
마음 먹고 바래봉에 올랐는데 풍경이 너무 좋습니다. 아쉽게도 철쭉은 만개시기가 지나 시들고 있긴 했지만
봄날의 끄트머리를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아직 싱싱한 철쭉들도 곧잘 보입니다. 일출 기다리고 사진찍고 하느라 여기서 1시간을 까먹었습니다.
종주의 꿈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날이 조금씩 밝아지면서 철쭉의 색감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함께 이동한 안내산악회 회원님 중 드론을 갖고 와서 촬영한 분이 있더군요. 처음 본 드론이 마냥 신기합니다.
해가 뜨는 방향 오른편에 위치한 천왕봉에도 박명이 비추고 있습니다.
서서히 머리끄댕이가 보이기 시작하는 지리산 바래봉 일출.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누리고 있네요.
철쭉과 어우러지니 감탄도 두 배가 됩니다.
동이 터오기 무섭게 반대편 하늘도 푸른 창포빛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부지런한 진사님들이 일찌감치 진을 치고 서서
바래봉 일출을 뷰파인더에 담고 있습니다.
각 잡고 후보정 한판. 일출과 운해, 역광이 만들어낸 실루엣의 조화가 마음에 듭니다.
이제 해가 완전히 떴습니다. 슬슬 이동할 시간. 그런데 이래가지고 종주는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물리적 시간이 부족해보입니다.
일단 팔랑치쪽으로 이동합니다. 가서 상황보고 결정하죠 뭐.
남원 운봉읍 용산리 방면. 용산리 뒷편으로 백두대간길과 천황산이 속한 천황지맥이 유유히 흐릅니다.
함께 길을 나선 산악회 회원과 나란히 걷다가 그림자만 담아서 찰칵.
이른 아침 서늘한 기운 속에 걷는 촉촉한 숲길은 참 기분 좋습니다.
팔랑치로 가다가 뒤돌아본 철쭉군락지. 아직은 볼만하지만 다음주부턴 본격적으로 시들 태세더군요.
조금만 더 가면 팔랑치 철쭉평원이 나옵니다. 평원이라고 하기엔 덕유평전이나 세석평전 크기와 비교하면 사뭇 다릅니다.
팔랑치 평원에서 바라본 부운치, 세동치, 세걸산 방향. 산등성이를 휘감은 연한 아침안개가 운치를 더해줍니다.
유난히 멋쟁이가 많은 산악회입니다. 장비도 멋지고 산행실력도 매우 준수합니다. 이분들 따라가려면 저도 혀가 배꼽에 닿을 판...ㅠㅠ
아침이슬 머금은 철쭉. 밤잠 포기하고 밤새 달려온 보람이 있는 하루의 시작입니다.
정령치까지 앞으로 7.1km. 한참 가야 됩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1시간 가량 뒤쳐졌습니다. 산악회 대장님은 오전 11시까지 정령치에 도착 못하면
그냥 대기하라고 합니다. 성삼재 도착마감시간은 오후 2시. 마음이 급합니다. 일단 되는대로 달려보기로 합니다.
뒤돌아본 바래봉. 지금쯤 용산마을주차장에는 차들이 줄줄이비엔나처럼 들어오고 있겠죠.
병꽃나무. 올해는 싱싱한 병꽃나무를 거의 못본 것 같습니다. 시기를 놓쳤나 봅니다.
부운치~세동치~세걸산까지는 계속 길고 좁은 길이 이어집니다. 화장봉에서 촛대봉까지 가는 길을 연상시킵니다.
졸방제비꽃. 여기저기 흔하게 피어있습니다.
바래봉에서 시작하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장점은 줄곧 천왕봉을 시선에 두고 걸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철쭉은 그저 거들 뿐.
저 멀리 천왕봉이 보입니다. 그 앞으로 명선봉, 토끼봉도 보이고요. 오른쪽으로 쭉 가면 반야봉과 노고단도 있겠죠.
밥도 제대로 주저앉아 먹지도 못하고 달리는 동안 4km 앞까지 왔습니다. 세동치입니다.
미나리아재비. 하늘하늘 유연한 줄기가 춤추는 무희같군요.
앞선 부부산객도 성삼재까지 가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분이 타고 온 버스는 오후 5시까지 성삼재로 오라 했다는군요.
시간을 너무 많이 줘도 골치아프더데. 시간이 많다고 마감시간 딱딱 맞춰 모두가 산행마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늦는 사람은
항상 늦습니다. 그거 습관입니다.
아직 해가 들지 않는 시간이라 얼레지가 꽃잎을 열다 말았습니다.
세걸산까지 왔습니다. 끝물 지난 할미꽃 한 송이가 남들은 다 씨방 맺고 있는데 홀로 피어 계절을 버티고 있네요.
앞으로 3.8km. 간당간당하게 오전 11시까지는 정령치에 떨어질 것 같습니다. 힘내봐야죠.
야광나무. 예쁘게 피었습니다.
쇠물푸레나무. 이팝나무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꽃이 더 작고 모양도 다릅니다.
철쭉이 양옆에 도열한 숲길을 위풍당당하게 통과합니다.
참꽃마리. 햇빛을 받으니 조금씩 푸르스름하게 변한 녀석도 보입니다.
덩굴꽃마리로도 보이는데 급하게 찍느라 꽃이 줄기 중간에 피었는지, 위에 피었는지
확실하게 살피지 못했네요.
정령치에서 출발해서 바래봉으로 가는 인파가 많아 가뜩이나 좁은 등로에 계속 정체가 생겼습니다.
저쪽에서 오는 인원은 단체, 저는 혼자이다 보니 계속 기회를 놓치게 되네요. 간신히 고리봉 앞까지 왔습니다.
서북능선에는 고리봉이 두 군데 있더군요. 정령치 위에 있는 고리봉은 큰고리봉, 성삼재 위에 있는 고리봉은 작은 고리봉입니다.
정령치휴게소에 떨어진 시간이 오전 11시 10분. 여기서 잠깐 갈등했습니다. 10분 차이를 빠르게 따라잡을 것인가,
날도 덥고 힘도 빠졌고 배는 아까부터 고픈데 그냥 주저앉아서 후미조 기다릴까. 근데 지금 성삼재까지 안 가면
다음에 또 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가자! 배낭에서 행동식 꺼내 건빵주머니에 우겨넣고 만복대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정령치에서 만복대까지는 오르락 내리락 계속 반복입니다. 죽겠네요 ㅠㅠ
코오롱에서 판매하는 파워젤 안갖고 왔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듯.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파워젤 구입해봤는데요.
기존에는 자전거 타는 선배가 직구로 구입한 외국 파워젤 몇 개 얻어서 테스트만 해봤더랬습니다. 국산은 처음입니다.
일단 이거 효과 좋습니다. 파워젤 자체가 고함량의 카페인을 주성분으로 하기 때문에 장복하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20km 이상 장거리 뛸 때 비상용으로 챙겨가면 꽤 도움 됩니다. 지속효과는 제 기준으로 보면 2시간 정도. 2~3개만
들고 가면 하루 장거리 뛸 때 먹기엔 적당합니다. 레드불 같은 마시는 부스터보다 효과는 더 좋게 느껴집니다.
저기 만복대가 보입니다....만, 대체 저기까지 언제 올라간단 말인가 ㅠㅠ 2시간 안에 성삼재 떨어져야 되는데 미치고 팔짝 뛰겠습니다.
이제와서 다시 정령치로 내려갈 수도 없고. 파워젤 하나 쭉쭉 빨고 다시 또 갑니다.
헉헉 드디어 도착한 만복대 정상. 정령치에서 50분 걸렸습니다. 10분 정도 단축했네요. 이제 성삼재까지 2시간 안에
내려가야 됩니다. 정상석만 사진 대충 찍고 빠르게 하산길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아 근데 이런 그림같은 풍경이 자꾸 발목을 잡네요;; 저 멀리 짝궁뎅이 반야봉이 보입니다. 6월에 노고단~반야봉 찍고 뱀사골 하산 코스를
한 번 가볼까 하는데요. 거리가 오늘 코스와 거의 흡사합니다. 오늘 시간내 완주 성공 못하면 때려쳐야죠 ^^;;;
저어기 멀리 성삼재 주차장이 희미하게 보이고 가야 할 길은 이리도 선명하게 험난하고. 환장하겠네요;;
성삼재까지 앞으로 5km. 하산길 감안해서 5km면 2시간 내에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뒤돌아본 만복대의 너른 어깨. 저기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합니다.
만복대. 완주고 뭐고 꽃밭에 앉아 하염없이 내려다 보고 싶은 충동이 이는 멋진 곳입니다.
만복대에서 묘봉치, 묘봉치에서 성삼재까지도 오르락 내리락 반복입니다.
묘봉치 방향. 우측 저 끝에 성삼재 주차장.
햇빛을 받아 광이 번들번들 나는 미나리아재비.
연분홍 꽃무리가 어여쁜 쥐오줌풀.
묘봉치 도착. 앞으로 3km. 남은 시간은 1시간 15분. 조금씩 자신이 붙습니다.
폴솜대가 피었습니다. 덕유산에 자주솜대 보러 가야 되는데 올해도 텄네요. 원추리로 급선회해야 할 듯.
뒤돌아본 만복대. 하늘빛이 예술이로군요.
안녕, 궁둥이가 짝짝이라 슬픈 반야봉. 다음달에 널 보러 갈게.
노고단도 보입니다. 노고단 이후로는 아직 미답의 영역입니다. 올해는 성중 한번 뛰어야 하는데 과연 가능할런지.
얏호! 작은고리봉까지 왔습니다. 여기서 성삼재는 내리막에 거리가 짧으니 조금만 힘 내면 됩니다.
아슴하게 보이던 성삼재 주차장이 이젠 제법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만큼 가까워졌군요. 남은 시간 30분. 막판 스퍼트 돌입합니다.
지금 시각 오후 1시 57분. 간발의 차로 마감 전 산행종료! 산행대장님의 배려로 화장실에서 씻고 짐정리할 시간을 얻었습니다.
씻고 나오니 맥주 한잔을 따라주시네요. 꿀물이 따로 없습니다.
빠질 수 없는 쿠리군 근황도 한컷.
아빠만 없으면 이런저런 사고를 쳐서 엄마한테 직싸게 혼나는 쿠리. 오늘은 음식물쓰레기봉투를 갈기갈기 찢어놨다는군요.
최고급 참치뱃살만 찾게 생긴 얼굴로 그 드러운 건 왜 건드려서 매를 버는거니 대체;;
고양이는 집사가 99번 잘해줘도 1번만 서운하게 하면 홱하고 토라져서 마음을 안준다고 합니다. 참으로 얄미운 종자에요.
하지만 저는 또 달라요. 99번 속상하게 해도 1번만 애기짓하면 그게 너무 예쁘고 고마워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오늘도 집에 와서 이름을 부르니 숨숨집에서 타박타박 걸어나와 제 발목에 얼굴을 부비는데 어찌나 반갑고 대견한지.
하루동안 집을 비운게 미안하고 반겨줘서 고마운 마음에 간식캔 하나 따서 덜어줬더니 그거만 먹고 다시 숨숨집으로..(응?)
뭐야..서,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나...?!
.
.
.
모처럼의 무박 원정산행. 지리산 서북능선 잘다녀왔습니다. 밀린 숙제 하나 털어낸 기분입니다. 설악산에 다녀오면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 같은게 있는 반면, 지리산을 다녀오면 생채기에 새살이 돋는 것처럼 치유되는 기분을 느끼곤 합니다.
또 한번 도움받았습니다. 몹시 달고 깊은 잠을 자게 될 것 같군요. 남은 주말 즐겁게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 
등록안내
등록안내
0
0
운정백운
저런 풍경은 흔하지가 않은데
시간제한이 많이 아쉽네요
잘봤습니다.
그런데 저는 무박산행의 경우 한없이 늘어지는 것보다 조금 타이트하게 진행하는 편이 더 낫더라고요. 그래야 서울에 올라와도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요. 밤 9시 넘어서 서울 떨어지면 피로감이 두 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