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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엔 꿈을 참 많이 꿨다.
특히 익숙한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순간이동해서 하늘의 텅빈공간에 놓여진다든지, 끝도 보이지 않는 천길 절벽에서 추락하거나, 아주 높은 건물에서 자유낙하 한다거나 하는 그런 꿈들이 많았던 것 같다.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경험이나 그 뜻 조차 잘 모르던 나이 였음에도 본능적으로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직시라도 하는 듯 두려움과 공포에 쌓여 어쩔 줄 몰라 하지만, 바닥(때로는 허공)에 닿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극적으로 이상한 초능력을 발휘해서 하늘을 향해 붕 날아 오르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계속해서 꿈을 이어갔다.
프로이트의 [꿈의해석]이나 어느 용한 무속인의 기똥찬 해몽, 또는 RAM수면 같은 의학용어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어렴풋이나마 이 꿈들이 뭘 의미라는지, 그리고 그 꿈 속에서 자신은 여전히 어디선가 살아있는 존재로서 숨쉬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년기 시절처럼 요즘도 이런 꿈들을 가끔씩 꾸는데 그 결말은 예전과 조금 다르다.
끝내 비상하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깨거나, 아예 이 공포영화의 필름이 싹둑 잘려지고는 전혀 다른 영화의 한 장면으로 바뀌어 버리기 일쑤다.
이런 꿈을 꾸고 난 후엔 하루종일 기분이 꿀꿀하거나 뭔가 안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가 많아, 무릎을 탁 치며 '아하! 흉조를 예견하는 예지몽이구나' 하고 어거지로 갖다 붙일 뿐 점점 꿈에 대해 무감각 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꼬꼬마 유년기엔 뭔가(그게 무엇인지는 자신도 모른다)를 어쩌면 이룰 수도 있을 거라는 가능성, 그리고 아직은 죽음이라는 '바닥'에 닿기까지 비교적 많은 시간들이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때문에 그렇게 다시 날아 올라 그 꿈을 이어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바닥'과 '끝'을 직, 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해 가고 있는데다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열정 마저도 품기 어려운 나이가 되다보니 이제는 그 악몽 속에서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 헤쳐 나갔던 그 꼬꼬마가 부러워 지기까지 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텅 비어가는 속을 채우기 위해 몇 번의 장기여행을 떠나고 또 돌아오기를 반복해봤지만 매번 반이라도 채우기는 커녕 마음 한구석이 뚫려버린 듯한 공허함이 더 커져서 돌아왔던 것 같다.
마치 고장난 시.계.바.늘.이 어느 순간 멈추고 같은 곳으로 되돌아 오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속편하게 '여행앓이'나 장기여행의 '후유증' 정도로 치부 해버릴 수도 있다.
어쨌거나 어린 시절의 그 무한한 '가능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의 한 가운데 놓여 단지 시간만 기계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내게 새로운 '가능성'(그게 뭐가 됐든)에 대한 열망과 아리송한 기대감 때문에 이렇게 또 먼 길을 나선 걸지도 모르겠다.
긴 여행에서는 어떤 많은 것들로 채워 오기도하고, 아무것으로도 채우지 못하기도 하고, 오히려 많은 것들(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을 버리고 오기도 하는데 나는 이 셋 중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면서 모두에 해당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때로는 눈으로, 마음으로 아름다운 풍경과 어느 인연의 따뜻한 마음으로 채워오기도 하고, 뭔가를 계속 찾아 나서지만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약간의 돈과 시간 그리고 소유욕과 사념을 조금씩 버리고 오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뭔가로 꽉 채우지 못하고 돌아오는게 어쩌면 당연한건데 쓸데 없는 생각들로 매번 시간만 낭비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지금 나는 꽤 긴 일정의 여행을 하고 있고 매일 매일 뭔지도 모르는 뭔가를 분명 찾아 헤맬 것 같다.
이번 여행이 끝날때까지...
'꿈'과 '가능성'을 단지 이루지 못할 허무맹랑한 잠꼬대 같은 소리나, 실현 불가능한 이상 정도로 그 범위를 줄여 버리기엔 내 남은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내가 이렇게 신들의 정원 한 가운데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것조차 가까운 과거에 '절대' 이루지 못할 '꿈'이라 생각 했었으니 말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라는 2002년의 그 함성처럼 꿈은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 해야 한다!
루클라(Lukla)에서 지리바자르(Jiri Bazar)까지의 트렉은 루클라(Lukla)에 위험천만한 미니공항이 생기기 이전에는 엄청나게 붐비는 곳이었다.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Everest)를 포함해 눕체(Nuptse), 로체(Lhotse),초오유(ChoOyu)등의 8,000m, 7000m 고봉들이 즐비한데다 이곳들을 등정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들( 장비, 식량, 의료품 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물자수송은 수 십의 당나귀와 포터, 원정 대원들의 긴 행렬 그 자체였다.
지역은 다르지만 'K2'라는 고전 산악영화를 본다면(봤다면) 충분히 이 시끌벅적한 풍경에 대한 참고가 되리라!
EBC기준으로 북으로는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이 버티고 있어 이동이 불가능하고, 나머지 방향으로도 높고 낮은 산맥이 겹겹이 둘러 쌓고 있어 이동이 쉽지 않은데 그나마 남쪽으로 내려간 후 서쪽으로 가다 보면 만날수 있는 지리바자르(Jiri Bazar)가 유일하게 접근이 용이한 육상 운송로였으니 얼마나 이 지역이 활기 찼었고 붐볐었는지 대충 상상이 된다.
하지만 항공기술의 발달과 루클라(Lukla)에 미니공항이 생긴 이후엔 거의 모든 원정물자의 수송은 비행기로 대체 되었고 당나귀와 포터, 롯지들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지금도 이 지역을 다니다 보면 당시의 그 화려했던 전성기를 보여주는 과거의 단편들을 많이 볼수 있다.
가령 다 쓰려져가는, 아니 흉물스럽게 남아있는 큰 규모의 건물이나, 어느 나라 어느 원정 대원들과 찍은 흑백 사진들로 현관 앞을 장식한 롯지나,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낡고 부서진 'WAY to EBC'이정표와 포터와 당나귀를 대량 렌트 해준다는 간판들을 보면 지금의 상황들과 너무 동떨어져 어색하기만 하다.
이제는 EBC로 향했던 옛사람들의 흔적들 마저 빛바랜 추억으로 남은 이 트렉은 그 상징적 의미를 경험해보는 것 뿐만 아니라 어쩌면 지금(눈,설산,눈,설산의 연속)까지와는 달리 우리네 시골의 이른 봄을 듯한 친숙한 풍경들을 보며 한적하게 다닐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곳을 택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하지만 산(몇일에 걸쳐 오르막내리막을 경험 해야하는 고된 길)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나 하얀 만년설을 머리에 얹은 여느 고봉을 상상하고 선택하게 된다면 엄청난 후회와 지침이 내내 따라 다니며 괴롭힐 것이다.
특히 롯지의 편의시설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결코 좋은 편이 아니지만 물가가 굉장히 싸서 금전적 부담은 훨씬 덜한 편이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게 좋다!
루클라(Lukal)에서 아침을 간단히 먹고 새로운 트렉으로 접어든다.
앞서 글에도 있지만 뭔가 거대하고 웅장하고 경이로운 풍경과는 이제 멀어지고 대신 흙먼지 이는 산길을 터벅터벅 오르내리는, 마치 오뉴월 바싹 마른 지리산 종주길 같은 곳을 걸어가지 않을까 싶다.
이미 충분할 정도로 하얀 히말라야를 보따리에 한가득 담았기에 이에 대한 미련은 크게 없지만 가보지 못한, 아니 갈수 없었던 몇 몇 서브트렉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수 없나 보다.
루클라(Lukla)에서 남쪽으로 조금 평지를 걷다보니 갑자기 급경사의 계곡으로 길이 뚝 떨어진다.
지도의 등고선, 여러 책이나 검색을 통한 사전조사에 의하면 이제 산들로 이루어진 빨래판 위 그 첫 하강인 셈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나절의 전원 풍경은 내 눈동자의 곡면 끝부분으로 조용하게 흘러만 간다.
Stop Child Labour!
후진국(이건 단지 물질문명의 발달 정도로 매겨진 척도)에서는 아직도 어린 꼬마들의 노동력이 많이 착취당한다.
충분히 먹고 살 만 한 나라에서는 애들에게까지 이런 노동을 시킬까 싶지만 사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아버지의, 그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그만두고 서울로 상경해 허드렛일을 한다거나, 공순이 공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어느 악덕회사에게 노동력을 착취 당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를 들을 때는 가사의 의미조차 알려하지 않고 그저 흥겨운 아카펠라 장단에 흥얼거렸던 게 생각난다.
이곳 네팔에서도 여러 이유(특히 경제적)로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고 밭을 일구거나 일찌감치 가이드(이건 고급직업군!)나 포터로 직업을 정하기도 한다.
먹고 살 만한 사람들에게는 분명 아동학대이고 노동력 착취겠지만 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생존'이라는 이면도 있으니 무조건적으로 저런 캣치프레이즈를 내거는 것도 좀 우습다.
길을 걷다가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을 때면 어디선가 귀여운 혹은 얼굴이 온통 콧물로 범벅된 꼬마가 펑 하고 갑자기 나타나 구걸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요늠들이 뻭~ 빽~ 쀍~ 이럴때면 길 잘못 들어서 빽도하라는 건가?, 뒤돌아 보라는건가? 갸우뚱 하지만 그 진짜 의미는 'beg'이었다.
물론 안그런 애들도 많고, 단지 호기심에서 다가왔던 경우도 많았지만 '뻭'을 외칠땐 난 항상 다리를 들이 밀거나 어깨가 아프다는 시늉을 냈다.
그냥 약간의 돈이라도 손에 쥐어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 싫었다.
만일 근처에 잡화점이라도 있다면 공책이나 볼펜, 하다못해 군것질거리라도 사주겠지만 이런 곳은 큰 마을에나 있으니...
1분이든 10분이든 다리를, 어깨를 그렇게 주물러 주면(사실 힘이 없어 별로 시원하지도 않다) 웃으면서 아주 시원했다는 표정을 짓고는 적당한 돈을 쥐어줬다.
이런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잘한 행동 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으나 이렇게라도 이 애들에게 노동의 댓가(단지 구걸이 아닌)에 대한 진짜 의미를 미약하게나마 알려주고 싶었고, 또 이 아이들이 너무 측은해서 이기도 했다.
트레킹 도중 곳곳에서 도네이션 박스(Donation Box)를 만날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매번 약간의 돈을 넣으면서 큰 도움이 될까 싶은 의구심도 들었지만 마음만은 편안하다.
아직도 타멜거리의 수많은 아이들은 검은 비닐봉지(용도는 상상에 맡긴다)를 한 손에 쥐고서 'beg'을 외치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슬픈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의 힘 없는 눈동자를 보고 있는 내가, 점점 무덤덤해져 간다는 걸 느낄때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몇 몇 중요한 구간(하루단위로 끊어지는)에서는 그래도 제법 깨끗하고 현대식으로 지어진 롯지들도 많다.
내부는 어차피 다 비슷비슷해서 이젠 그려러니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음식이다.
맛과 양, 질이 같은 가격임에도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나 이걸 제대로 선별할 수 있는 트레커가 있을까?
가이드나 포터의 도움이 있다면야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만 혼자 다니는 나로선 그냥 히말라야의 신들에게 맞길 뿐이다.
긴 오르막, 긴 내리막, 아주 가끔 나오는 평지...
허벅지의 근육들이 잠시 쉴 수 있는 평지가 나올때면 기분이 참 좋다.
짧게 이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그 길을 음미한다.
내내 이런 길이라면...참 좋겠지?
고지대와는 달리 이제는 짐을 나르는 동물들이 야크에서 나귀로 바뀌었다.
눈썰미가 좋은편이 아니라서 당나귀인지 노새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이 행렬 중간에는 절대 끼면 안된다는 것이다.
좁은 길에선 양쪽 짐에 눌려 압사하거나 절벽으로 떨어져 추락사 할지도 모른다.
동물들에게는 대부분 '배려'라는 단어가 없다.
그리고 동물같은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네팔 어느곳이나 전기사정은 좋지않다.
이건 카트만두나 포카라 같은 대도시도 마찬가지며 수력발전에 의지하는 지역의 경우 건기에는 아예 발전을 멈춰버린다.
고쿄(Gokyo)나 고락셉(Gorakshep)같은 트레킹 지역은 어차피 전기를 끌어갈 수조차 없으니 예외로 두자.
전봇대를 통해 제대로 전선들이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낙후된 산간지역에는 이렇게 생목(그야말로 살아있는 나무)이 전봇대를 대체하기도 한다.
나무가 고통을 느끼는 감각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속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고 일부 과학자들의 연구성과로는 '사실'이라고 하니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하지만 지구의 진정한 생태학적 주인은 식물이라고 아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인류가 사라져버린 지구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보라!
단단하고 검은 아스팔트는 연초록의 이름 없는 풀들로 뒤덮힐 것이며, 한껏 쌓아 올린 고층빌딩에는 바람결에 실려온 갖가지 풀과 나무의 씨앗들이 뿌리내리고, 볕이 들지않는 음지의 콘크리트벽마저도 이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짧게는 몇년, 길게는 수천년의 생을 이어가는 나무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하루가 참 짧게 끝나가는 것 같다.
몇 개의 산을 오르락 내리락하거나 능선을 휘감은 길을 걷다보니 벌써 늦은 오후빛이 연노란 색으로 길을 물들인다.
난 늦은 오후의 이 빛을 참 좋아한다.
노란색도, 다홍색도, 붉은 색도...
해가 뜬 직후의 그 색들과도 닮아 있지만 뭔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더욱 화려하게 타오르며 세상을 수 놓는 듯한 강렬한 빛...
내 마지막 삶도 이런 모습으로 물들어 간다면 작은 후회조차 남지 않을 것 같다.
붑사(Bupsa)에 도착, 더 이상 가지 않고 머물기로 한다.
흙먼지를 많이 뒤집어 쓴데다 아직 기후적응이 안된 듯 땀을 많이 흘려 몸이 찌뿌둥하고 약간의 피로감도 있다.
더 갈수도 있지만 가봐야 전체 일정상으로 하루 차이가 날까 말까 한데다 애초에 이 트렉은 그냥 걷자! 천천히 걷자!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자! 라는 컨셉이었기에 스톱, 배낭을 내려놓고 롯지밖에 나와 마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뭐가 있나 하고 둘러본다.
역시 예상한대로 이 시기의, 이 지역에서는 깨끗한 하늘을 보기가 참 힘들다.
아침나절 잠깐 대기가 안정 되었을 때만 청명하고 그 시간을 제외하면 미세먼지와 황사에 시달리는 한국의 이른 봄과 꼭 닮아있다.
그래도 이렇게 옅은 파스텔톤으로 색칠된 하늘빛도 크게 나쁘진 않다.
롯지 바로 뒤의 언덕에 올라 저무는 해를 그저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소쩍새 소리가 들린다.
여기도 소쩍새가 사는 모양이다.
지금껏 산봉우리 아래로 해가 떨어지는 것만 보다가 산등성이 중간으로 해가 사라져가는 걸 보니 뭔가 어색하다.
게다가 원형의 태양이 점점 사라져가는 일몰 자체도 루클라(Lukla) 오기 전 공항에서 보고는 처음인 듯 하다.
대부분 한참 이른 시간에 고봉들 너머로 사라져 버리기에 가로막고 있는 봉우리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지 않는 한 이 모습을 보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샛노란 원이 검은 산등성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롯지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다.
보통 요리시간이 짧은 음식은 아침에, 긴 음식은 저녁에 먹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는 달밧이다.
네팔 트레킹 중에는 양질의 단백질을 보충하는게 아주 어려운데 달밧의 렌즈콩으로 이게 가능하고 무엇보다 리필이 가능해서 두번, 세번 배를 채울 수 있다.
먹은 만큼 간다는 말도 있듯이 나는 어디를 다니든 충분히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하는 성격이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도 없고 맛과 질은 맨 나중에 생각하므로 달밧은 내게 있어 최고의 메뉴 그 자체다.
단점도 있으니 그건 밥을 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것과 제일 비싼 요리라는 것.(한국 단체 트레커들이 싹쓸이한다는 스테이크, 닭백숙 이런 건 구경조차 못했다!)
오늘도 여느때 처럼 달밧으로 주문했는데 상당히 만족스럽다.
보통은 콩을 넣고 끓인 국물에 삶은 감자(또는 얇게 튀긴 감자나 쌀반죽)나 야채를 곁들인 간단한 형태로 나오는데 여기선 커다란 쟁반 한 모퉁이에 밥을 탑처럼 쌓은 후 얇게 튀긴 감자칩을 그 옆으로 한가득 빙 둘러서 장식, 그리고 각종 야채를 볶아 소담하게 올려 뒀는데 결정적으로 식감이 질기지 않고 쫄깃한 육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흩뿌려 놓았다.
거기에 적당히 걸쭉한 달(스프)에도 콩이 한가득이고 절인 고추장아찌 또한 새콤달콤한게 맛이 기가 막힌다.
카트만두의 어느 고급 식당에서 먹었던 달밧보다 맛과 질 모두 한 단계 위인 것만은 분명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한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며 롯지여주인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니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며 저만치 앞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는 남편을 가리킨다.
주인장은 이 광경이 멋쩍었는지 달밧에 흡족해 하는 나를 보고 지그시 웃고는 하던 일을 이어간다.
일류요리사 대부분이 남자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문득 롯지여주인의 달밧도 한번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저녁을 먹은 후엔 방으로 돌아가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다이어리의 하얀 공백 채우기와 편지 쓰기 놀이에 열중해본다.
일반적인 관광지나 대도시, 아니 밤에 뭐라도 볼게 있는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산중에서는 해가 진 후에는 아무 할 일이 없다.
없어도 너무 없다.
양말을 빨거나 물품을 정리하거나 가계부를 적는 소일거리도 이제 너무나 숙달되서 이 세가지를 한번에 할수 있을 경지에 도달했다.
그 방법이 궁금하다면 나와 같이 여행을 떠나보면 터득할수 있으리라!
해가 넘어가고도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아직 8시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때우기용 소일거리를 포함해 모든 할일을 끝내버리니 방안엔 정적만 덩그러니 남아 버렸다.
에라 그냥 잠이나 자자, 지금 이순간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곳인 눈 앞의 침낭 속으로 슬금슬금 기어 들어간다.
낮에는 봄날 같지만 일교차가 커서 아침 저녁으론 꽤 추우므로 당분간은 침낭 속에서 자기로 한다.
남체에서 살까말까 잠시 고민했던 Into Thin Air가 자꾸 아른거린다.
어제 너무 일찍 꿈나라로 가버린탓에 새벽에 잠이 깨는 바람에 침낭속에서 눈꺼풀은 덮혀 있지만 그 속에서 눈을 뜨고 있는, 그런 상태로 아침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
7시에 아침으로 먹을 찐감자를 주문하면서 추가로 간식으로 먹을 요량으로 네다섯개 더 주문했다.
공산품(공장에서 나오는 모든 물품)의 경우 외진 지역에서는 상당히 비싼 편인데 당분과 열량을 충당하기에 좋은 쵸코바(라고 해봐야 스니커즈 1종류만 판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부르는게 값, 흥정을 잘해야 바가지를 안쓴다.
고쿄(Gokyo)나 고락셉(Gorakshep)같이 물류이동의 종점지에서야 그 값어치를 할 만한 가격이라서 이해하지만 산 아랫자락에서 조차 턱도 없는 가격을 부르기 일쑤다.
그래서 보통 트레킹 시작하기 전 타멜거리의 큰 상점에서 몇십개 박스채 사서 배낭안에 넣어 다니며 출출할때 까먹는데 이때문에 트레킹 초반에는 배낭무게가 좀 더 늘어난다.
또 한가지, 롯지에서 판매하는 건전지의 경우 유통기한이 언제 지났는지도 모를 중국제 제품만 수두룩하고 이 역시 비싸다.
불량 건전지에 대한 불안요소도 없앨겸 경비도 아낄겸 해서 카메라와 헤드랜턴에 쓰는 AA형 건전지를 매번 40알 정도 챙겨오는데 굳이 40알인 이유는 카메라의 세로그립에 8개, 헤드랜턴에 4개가 들어가므로 8의 배수 중 적당히 고른 것이다.
이런 소모품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자연스레 무게가 줄긴 하지만 쵸코바의 경우는 대부분 얼마 안가서 동나버리는데 내가 먹은 것 보다 애들에게 나눠줬던게 더 많았던 게 가장 큰 이유다.
랑탕과 ABC지역에 갔을때는 볼펜도 한가득 사가서 나눠주기도 했지만 이번 EBC트레킹에선 부피와 무게 때문에 제외한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삶은 감자는 아주 훌륭한 스니커즈의 대체재이다!
짐을 꾸려 롯지를 나서니 조그만 새끼고양이 한마리가 뮤우~뮤우~ 거리며 먹을 수 있는 뭔가를 던져주길 바라지만 내가 줄수 있는 거라곤 삶은 감자밖에 없구나.
미안하다.
지리(Jiri) 트렉은 깊은 계곡이 많은데다 여기저기 물줄기가 흐르고 있어 아침에 옅은 안개가 자주 끼는 편이다.
시야안에 들어오는, 앞으로 걷게 될 길의 형태가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평지구간으로 보인다.
아침부터 된비알을 치고 올라가야 하는 오르막이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불안하다.
오늘 구간은 지리(Jiri)에서 시작할 경우 거의 하루종일 내리막 구간이라고 알고 있는데 반대로 걷고 있는 나에겐 어쩌면 하루종일 오르막을 올라야 하는 지옥길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허벅지가 고통스럽다며 아우성 치는 것 같다.
그래도 길은 길일 뿐이다.
가다보면 못 갈 곳 없고, 오르다 보면 못 오를 곳 없다.
내게 주어진 길, 하물며 내가 선택한 길이라면 지옥길도 즐겁게 걷자!
얼마전에 부화한 노란 솜털뭉치의 병아리들이 삐약삐약거리며 정신사납게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어미닭은 아직 부화하지 못한 알들을 포근하게 품으며 천적들을 경계하고 있다.
흔히 어떤 사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제약과 장벽을 부수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껍질을 깬다'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두 개의 세상을 강하게 단절시키는 이 벽을 깬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익숙해져버린, 사소하고 중요한 모든 것들로부터의 이탈이며 자신을 보호-혹은 구속-하고 있던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이는 곧 처음부터 다시 벽 너머 세상에 다시금 익숙해져야 한다는 의미이며 어쩌면 벽 안에서의 편안하고 안락한 생을 이제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의미 이기도 하다.
물론 이 껍질 속 세상이 더이상 머물기에 너무 작게 느껴져 스스로 이 벽을 허물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거나, 본능적인 행동에 의해 이뤄질수도 있지만 자신이 무너트린 벽 너머의 세상은 두발로 내딛어 보기전엔 알수 없다.
그곳이 천국일지, 지옥일지, 더 큰 세상일지 아니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사막일지...
이 무모하지만 극적인 도전은 오로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는 하나의 도박과도 같다.
나는 벽을, 껍질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가?
아니면 지금의 세상에 만족하며 이 껍질속에서 안주할 것인가?
그 답과 선택의 순간이 내게도 찾아올 날이 올까?
동남아시아나 인도, 네팔을 여행 할때면 항상 가졌던 의문이 하나 있다.
도대체 이 맛 없는 쌀로 왜 밥을 하는거야!
푸석하고, 찰기없고, 부스러지고 게다가 식감이나 고소한 풍미도 훨씬 덜한데 말이다.
식물학자나 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실소하거나 니 입맛이 이상한거야 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통통한 한국쌀이 훨씬 더 맛있게 느껴진다.
나고, 자라고, 매 끼니를 이 쌀로 지은 밥을 먹으며 살아왔다 보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한국에서는 자포니카종을, 동남아시아나 인도 지역에서는 인디카종 쌀을 주식으로 한다.
인디카는 앞의 글처럼 길쭉하고 홀쭉한 모양에 찰기가 없는데 이는 아밀로스 함량이 자포니카종에 비해 5%정도 높아서라고 한다.
생산량으로만 본다면 자포니카종의 비율이 10%가 채 되지 않는데다 기온이나 강우량에 따라 다모작도 용이하니 괜히 내가 생떼를 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자포니카종이든 인디카종이든 3,900년 전 즈음부터 다른 종으로 분화가 시작되었고, 쌀의 기원은 중국 양쯔강유역에서 8,200년 전에 생겨났다고 하니 아마도 먼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쌀과는 많이 달랐을 수도 있겠다.
좀 시간이 지나면 적응할 줄 알았지만 3개월은 충분한 시간이 아니어서인지 여행 내내 한국쌀로 만든 밥이 그리웠다.
참고로 이 사진은 벼가 아니니 오해마시길!
'트레킹'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만한 한글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도보여행'이 제일 가까울 것 같다.
특별한 도구나 장치, 혹은 기술도 필요치 않고 단지 작은 배낭에 간편한 옷차림으로 나설 수 있는 그런 길...
오랜 취미 생활인 등산 역시 산으로, 봉우리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르는 것이니 이 역시 도보여행의 한 부분이지 않을까 한다.
단지 그 길이 얼음으로, 돌로, 흙으로 만들어 졌고 오르기 위해 자일이, 크램폰이, 피켈이 필요할 뿐이다.
굳이 선을 그어 분류해놓은 수많은 '등산'의 종류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나는 트레킹을 가장 좋아하고 즐긴다.
다른 분야(빙벽이나 암벽)에도 발을 살짝 담근 정도의 경험이 있지만 길게 이어진 산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거나 이 길 위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삶, 작게 반짝이는 나무, 이름없는 들꽃, 붉그스름한 노을 이 모든 것들이 너무 좋다.
때에 따라선 앞이 안보이는 짙은 안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것 같은 추위, 제 몸하나 가누지 못하는 거센 바람, 얼굴을 사납게 때리는 장대비와 눈폭풍 마저도 즐겁고 기쁘게 받아들이며 이 모든 것들을 느끼게 해주는 생에 대해 감사해한다.
오랜 세월 산에서 길동무가 되어 줬던 친한 형과 술 한잔 기울일 때면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지는 작고 예쁜 황혼의 길 위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다며 령이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서글퍼지고 숙연해지는 새드무비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만 한편으론 꽤 멋진 죽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처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는게 삶의 아름다운 끝 보다는 훨씬 나으리라!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길가의 작은 롯지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는다.
처음엔 이것저것 마음의 짐과 여러 잡념을 여기 지리(Jiri)트렉에다 몽땅 던져버리고 올 요량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하나씩 하나씩 버리리라 다짐 했었지만 빨리 갈래야 갈 수 없는 길로 점점 변해가는 것 같다.
EBC메인트렉에서처럼 쉴새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시간을 까먹었다 치면, 이곳에서는 분명 뛰어난 풍광이나 볼거리가 없음에도 가다서다를 반복하거나 걸음이 느려진다.
다소 긴 트레킹 일정에 조금은 지쳤거나 갇고 있는 길의 경사변화가 심한 탓도 있겠지만 그런 육체적 고단함이 아니라 마음이 어수선하고 복잡해서인 것 같다.
눈앞에 놓인 경이로운 풍경을 볼 때면 온통 거기에 신경과 정신이 집중 되는데, 이런 터벅길에선 그마저도 없으니 평소 빗장을 걸고 꽁꽁 숨겨두고 있었던 마음속 까다로운 숙제들이 하나 둘 풀려나며 머리를 어지럽힌다.
한평생을 떠돌아 다닐 순 없다.
고장난 내 시계바늘도 곧 어디선가 멈추고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돈은 얼마나 벌 것이며, 결혼은 언제쯤 하고, 애는 얼마나 낳고, 요즘 집 시세가 어떻고...
잠시동안 망각의 주문에 걸려 있지만 분명 내가 몸 담고 있는 세상에서 곧 직면하거나 이미 들이닥친 문제들이고 스스로가 또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다시 한번 이것들을 금고에 넣고 자물쇠로 채울지 아니면 하나씩 꺼내서 문제를 풀며 답을 도출할건지 잠시 고민해보지만 이러기도 저러기도 쉽지 않다.
그래! 결정했어!
어느 옛날 오락프로그램의 유행어처럼 딱 '한가지'만 결론을 내기로 하고 나머지는 꽁꽁 싸매서 저멀리 던져둔다.
붉은 색의 Red Sault, Great Martyers라는 글자와 붉은 네팔공산당의 깃발이 인상적이다.
네팔은 전통적으로 왕권국가였고 1990년대까지는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2001년 6월 희대의 궁중학살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된다.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술에 취해있던 디펜드라 왕세자가 MP5K(독일제 기관단총)과 M16(미국제 소총)으로 결혼에 반대하던 비렌드라왕과 아이슈와라 왕비를 포함해 9명의 왕족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디펜드라 왕세자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3일 후 병원에서 사망하고 숙부 갸넨드라가 왕위를 승계, 이후 공포정치로 인해 몰락하고 2008년에 왕정이 폐지되었고 그 후 많은 격변기를 거쳐 현재는 민주공화국에 이르렀다.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 발표 외에 수많은 의혹이나 음모론이 재기 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건 갸넨드라가 왕위를 물려 받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설이고 이에 대한 다큐까지 제작되었을 정도다.
한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어난 비극적 서사시인지, 암투와 권력욕에 물든 잔인한 살해극인지는 나도 알길이 없다.
다만 전자이든 후자이든 이 이야기의 끝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잔인하고 슬프다.
이 사건 이전부터 마오이스트(마오쩌둥 사회주의)는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 범위를 더욱 확대시켰다.
만일 지금도 마오이스트들이 과거처럼 크고 작은 내전을 벌이는 시기라면 혼자 이렇게 네팔로 떠나올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시기에 먼저 다녀갔던 많은 트레커들은 참 대담하고 용감했던 것 같다.
앙상했던 나무에 새 잎이 나고 연초록 풀들이 땅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걸 보니 봄은 봄이다.
하지만 기온자체만 봐서는 초여름에 가깝다.
가끔씩 이런 길이 나올때면 일부러 아껴서 천천히 걷는다.
마치 맛있는 요리를 먹을 때 허겁지겁 배를 채우기 위해 입에다 쏟아 붓는게 아니라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먹는 것 처럼...
된비알을 치고 오를때는 그 힘듦에 심장이며 종아리며 허벅지가 고된 노동을 하기에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오직 끝을 향해서만 발걸음을 지속할뿐..
호젓한 길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잠시동안 만이라도 이 시간을, 이 길을 즐기자!
하지만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편한 길은 금새 끝나버린다.
어쩌겠나... 세상사 다 그런 것을...
그래도 주어진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 그 끝에 서리라는 걸 알기에 오르고 또 오른다.
we extended heartly welcome to our respected donor, who has been supporting for long time on the sector of health electricity and education.
We wish forther progress and betterment of this trust.
눈탈라(Nunthala)의 마을입구를 지나는 길에 향나무의 가지로 만든 아담한 문이 지친 나그네를 반겨준다.
문 위 붉은 천에 쓰인 글을 대충 해석해보니 의료지원이나 전력시설, 교육사업에 대한 지원과 기부에 대한 내용같다.
어느 거부가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하기 위해 편한 시간에 훌쩍 떠나온 길이든, 평범한 샐러리맨이 애써 돈과 시간을 쥐어 짜내 떠나온 길이든, 여행 그 자체를 즐기는 어느 방랑객이 소리없이 찾아든 길이든 이 길을 지나는 그 모든 이들이 자그마한 도움의 손길이라도 전해주길 바라며 나 또한 지갑을 열고 숫자들이 적힌 종이조각을 기부했다.
그나저나 붑사(Bupsa)의 요리 잘하는 롯지 주인장 말로는 눈탈라(Nunthala)까지 네다섯시간 걸릴거라고 했지만 벌써 오후 2시가 넘어간다.
천천히 온 걸 감안하면 6시간 정도 걸린게 충분히 이해가지만 몸이 정말 고단하게 느껴진다.
붑사(Bupsa)에서 처음 길을 나설때의 내리막 이후, 작은 마을을 지나칠때 마다 나오는 짧은 평지구간을 빼면 전부 크고 작은 오르막길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도 EBC전 구간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하루였던 것 같다.
게다가 한낮 기온이 28도 근처다.
루클라(Lukla)에서 지리(Jiri)트렉으로 접어들때만 해도 이 정도 기온은 아니었는데 갈수록 무더워진다.
그나마 다행인게 습도가 그리 높진 않아 숨이 턱턱 막힐 정도까지는 아니며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긴 하지만 그늘이 아닌 볕 아래에서는 땀이 줄줄줄 흐른다.
하얀 만년설 아래에서의 바람과 추위가 이렇게 빨리 그리워 질 줄 몰랐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시 한번 차가운 빙하속을 거닐던 그때로 돌아가서 당시의 느낌을 떠올려 보는게 다다.
그렇다고 나무가 얼음 기둥이 되고, 풀밭이 눈밭이 되고, 바위들이 빙하가 되진 않겠지만 왠지 조금 시원해지는 느낌은 있는 것 같다.
온도조절기가 고장난 냉동고에 갇힌 사람이 동사 할 수도 있다고도 하지 않는가!
눈탈라(Nunthala)에 머물기엔 너무 이른시간이라 좀더 가보기로 한다.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볕은 많이 약해져 더위는 한 발 물러나는데 문제는 계속되는 오르막과 배낭의 무게다.
내가 여행길(등산이든, 고산트레킹이든, 둘레길이든)에서 가장 많이 고려하는게 배낭무게인데, 만일 일정동안 배낭의 무게가 심하게 체감되서 힘들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분명 무게조절에 실패한 경우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지금 내 배낭무게에 힘들어하고 있다.
특별히 오늘 일정에서만 느낀다면야 모르겠지만 앞으로 며칠 더 비슷한 길을 걸어야 하는데 걱정이 덜컥 앞선다.
눈탈라(Nunthala)를 지나고서도 이 오르막길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해가 슬슬 넘어가고 있다.
고단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탁신두(Traksindo)에서 걸음을 멈춘다.
평소 성격이라면 오르막 끝까지 올라간 후에 하루 묵을 곳을 정했을 텐데 오늘만은 예외다.
지도를 보니 오늘 힘들만 했다.
나는 탁신두 라(Traksindo La)를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롯지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양쪽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에서 해방되는가 싶더니 몸이 갑자기 붕 뜨면서 공중으로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
각종 편의용품은 고사하고 꼭 필요한 물품들로만 채운다고 채웠는데도 살림살이가 한가득이다.
나름대로 장기여행에 최적화 된 살림살이라고 자부했건만 아직은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가보다.
몸의 짐도, 마음의 짐도...
겉으로 보기에 무척 깨끗해 보여서 선택한 롯지이지만 예상대로 내부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
청소를 언제 했는지 모를 정도로 선반에는 먼지가 수북하고 천장에는 거미가 만들어 낸 하얀 그물망에 작은 티끌들이 달라붙어 그 무게 때문에 축 늘어져 있다.
게다가 침대커버와 이불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그리 민감하지도 않은, 아니 이런데 무감각한 나의 후각마저도 강하게 자극한다.
흡사 중세시대 마법의 영약을 만들어내던 어느 마녀의 허름한 실험실 딱 그 느낌이다.
단지 차이나는게 있다면 선반에 정갈하게 놓여있는 달라이 라마의 빛바랜 사진과 작은 라디오 정도...
보통은 이런 고가품?은 방에 잘 두질 않는데 이곳을 여행하는 트레커들에겐 적어도 도난의 위험이 없어서인지 그냥 두는가보다.
허름하고 불결해 보이는 방이지만 비좁은 텐트안에서 의식주를 모두 해결하며 장기간 떠돌아 다니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데다, 두 다리 쭉 펴고 자는 것 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만족감마저 얻는 편이라 금새 안락한 보금자리로 변해버린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일찍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여러명의 남녀 소리와 어지럽게 오가는 발자국 소리가 뒤섞여 침대 아래가 소란스러워진다.
혹시 무료한 시간을 달래 줄만한 말동무라도 있을까 싶어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트레커일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남녀 2쌍의 젊은 네팔리들이다.
뭐가 그리 신났는지 왁자지껄하게 오가는 대화의 끝은 언제나 커다란 함박웃음이다.
내가 낄 자리는 아닌듯 싶어 발걸음을 돌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마치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듯 그들의 대화와 웃음소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하기야 나무판때기로 허공을 가른게 다인 층 구분이니...
꽤 늦은 시간까지 아래층의 소란은 이어졌지만 몸이 피곤해서인지 이 소란을 자장가 삼아 금새 골아떨어졌다.
아침내내 뿌연 연무가 온 산을, 마을을 휘감는다.
저멀리 보여야 할 산등성이는 흐릿한 실루엣을 만들어 낼 뿐 맑고 깨끗한 느낌의 아침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처음 지리(Jiri)트렉을 택하면서 기대했던 풍경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차피 목적 자체를 좀 달리했기에 이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 것 같다.
어제의 그 남녀들은 아직 곤히 자고있는지 보이질 않고 롯지 주인내외만 아래층에서 미리 주문해 둔 내 아침을 만들고 있다.
그냥 평범한 맛의 볶음밥으로 공복을 달래고 간식으로 먹을 감자 몇알도 따로 챙겨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어제 미처 다 오르지 못한 탁신두라(Thaksindo La)의 고갯길을 이어간다.
이 지역 뿐만 아니라 네팔을 여행할때면 고대의 불탑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든, 없든 대부분 방치하고 있다 라고 할 정도로 '관리'라는 걸 하지 않는다.
문화유적을 잘 보호해 후세들에게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냥 현지인들의 삶 속에서 함께 낡고, 닳고, 헤져서 같은 세월을 보낸다는 의미로 생각해보면 어쩌면 후자가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덜발이나 빠딴의 무수한 크고 작은 유적들이 사람들의 쉼터, 비둘기의 둥지 혹은 화장실이나 빨래터로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만일 이 나라가 더 부유해지고 현대화 된다면 이같은 고대의 유물들은 원래있던 곳이 아닌 박물관이나 유리벽으로 둘러쌓인 폐쇠된 공간에 전시되어 줄서서 관람해야 할지도 모른다.
작은 보라색 꽃들 너머로 이끼 낀 스투파가 보인다.
스와얌부나트나 빠슈빠쉬나트, 보드나트는 나중에 꼭 가보도록 하자!
참호같이 길게 패여진 길을 따라 가던 중 십여명 정도의 사두(Sadhu)들을 만났다.
옅은 주황색 옷차림에 터번을 두르고 있는데다 하나같이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어 감히 다가갈 생각마저 튕겨내 버리는 무형의 아우라로 둘러쌓인 듯 하다.
사두(Sadhu)는 힌두교의 시바(Shiva)신을 따르는 영적 스승으로서 몸과 마음을 한평생 아니 몇 번, 몇 만번의 생(還生)을 통해 해탈(解脫)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들인데 인도나 네팔의 신성한 종교유적지(혹은 이름난 관광지!)에서 흔히 볼수 있다.
히말라야 자락, 특히 네팔쪽은 티벳불교의 영향이 훨씬 더 크기에 트레킹 도중 사두(Sadhu)를 만나기가 쉽진 않다.
물론 안나푸르나의 묵티나드 같은 성지에선 자주 볼수 있지만 쿰부히말이나 랑탕지역과 같이 티벳과 국경을 마주한 곳에서는 좀처럼 힘들다.
이 사두(Sadhu)들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는 내게 다가와서 작은 깡통(토마토 케찹상표가 떡하니 붙은)을 내밀며 두 손을 합장한다.
힌디어로 나즈막하게 경전? 을 읇는데 이 작은 음의 파동은 지금 여기가 산자락이 아닌 어느 신성한 사원에 들어서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만든다.
만일 관광지였더라면 절대 내 지갑을 열지 않았겠지만 이들의 진지하고 경건한 눈빛에 한순간 매료되어 숫자들이 적인 종이들을 깡통에 몇장 넣었다.
통 속에 들어간 종이의 숫자는 알아 볼 가치조차 없는 듯 잠시 다시 한번 내 귓전에 알아듣지 못하는 작은 속삭임을 남기곤 다시 어딜론가로 향하기 시작한다.
기분이 살짝 좋아지는 이유는 뭘까..
준베시(Junbeshi)즈음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아직 한참 남았나보다.
어제보다는 덜하지만 아직 그 피곤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발걸음이 그리 가벼운 편은 아닌 것 같다.
소담스럽게 핀 꽃들을 볼때마다 번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만 몇 송이 따다 다이어리 사이에 정성스레 끼워두곤 했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조금이라도 예쁘게 장식하고 싶었던 소박한 꿈이었지만 꽃잎이 너무 얇아 며칠내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꽃 그 자체도 너무 바싹 말라버려서 급기야는 살짝만 건드려도 바스러져 버린다.
그나마 형체가 온전하게 남은 것 마저도 투박한 손으로 풀칠하다가 편지지를 장식하기는 커녕 너저분해져서 나중에는 그냥 보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그 시도된 정성만은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트레커들에게 보물창고와도 같은 곳이지만 이제 저 문을 통과하려면 많은 고민을 해야한다.
출국할때 달러로 환전한게 아니라 여행자수표(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그나마 공신력 최고이다)만 가져온데다 그때그때 트레킹에 필요한 만큼만 현지화(루피)로 환전해서 다니다보니 가끔씩 잘못된 예측, 혹은 도난 등으로 인해 경비가 모자랄 경우가 생긴다.
물론 여행자수표도 대부분 바로 환전이 가능하지만 조그만 시골 마을 같은 곳에선 쉽지 않고 수수료도 엄청나다.
게다가 TC(여행다수표)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앞으로 지리(Jiri)까지의 남은 일정동안 먹고 잘 비용으론 얼추 맞아떨어지지만 비상금(절대 사용할 수 없는)까지 털고 싶지는 않아 입맛만 다신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시원한 탄산음료와 스니커즈가 아니라 어쩌면 조그만 '인내'인것 같다.
보라색 꽃(앵초)들 사이에서 크기와 색이 다른 이종인 민들레가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며 예쁘게 피어난다.
'갈등'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칡나무와 등나무는 자라나면서 하나는 왼쪽으로, 또 하나는 오른쪽 방향으로 뒤틀림이 회전하기에 절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하지만 의지해야 할 지지기반이 아무것도 없을때 이 두 나무의 덩쿨은 서로의 무게를 지탱하면서 허공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만일 한 나무만 존재한다면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또아리를 틀거나 바닥으로만 나아갈 것이다.
부정적으로만 다가왔던 이 단어조차 잘 살펴보면 그 속에 동전의 '이면' 과도 같은 다른 뜻이 숨어 있다는게 신기하다.
같으면서도 다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직 닫혀 있는 꽃망울을 활짝 틔울수 있는 날이 나에게도 찾아오겠지?
남체(Namche)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질 만큼 요 며칠 동안 머릿속 기억을 많이 지워낸 것 같다.
길 위에 놓인 것들과, 기온과 바람이 그 곳과는 전혀 다르지만 이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언제나 같다.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비워내고 오직 이 '길'이라는 것에만 집중 한다면 어디를 걷든 그 곳이 히말라야의 설산속이며, 티벳의 고원들이며, 동네 뒷산의 친숙한 길로 그려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아침나절 기나긴 여행길에서 잠시 낯선 동양인과 스쳐 지났던 사두(Sadhu)들처럼...
준베시(Junbeshi)는 이번 트레킹 지역에서 만나는 꽤 큰 마을이고 롯지들도 많아서(이 말은 곧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이다) 잠시 쉬어갈 겸 가장 맛있는 요리를 내 올것 같은 롯지에서 점심을 먹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설익은 밥에 간도 맞지 않아서 연신 소금과 후추를 뿌려대며 배를 채웠다.
고추장이 참 그리운 점심이다.
낡은 나무팻말에 새겨진 이 이정표에는 내가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할 곳, 그리고 가볼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곳들로 가득하다.
일정 속에 매여 정해진 길, 뻔히 어디에 뭐가 있을지 이미 알고 있는 길이 아니라 조금은 색다르고,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을 가지고, 막연하게 떠오르는 모험심을 자극하는 낯선 길로 들어서고 싶을때가 종종있다.
그만한 용기와 깜냥을 아직 가지지 못한 지금의 나로선 가장 안전하고 평범한 길을 선택할 뿐이다.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갔던, 나아가고 있는 그리고 나아갈 수많은 선구자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깜빡하면 지나칠 수도 있는 갈림길을 살아가면서 유무형으로 많이 만나게 된다.
결국에는 한곳으로 모여지는 길이라면 잠시 돌아가는 정도겠지만 영영 수평적 무한대로 절대 만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저 주어진 길을 걸으며 작은 표식이나 이정표를 놓치지 않으려 애써보지만 한결같이 그 정도의 길만 선택하는 건 아니기에 이 '인생'이란 짧은 여행이 더욱 흥미진진해지는 건 아닐까?
문득 헬람부에서 하루를 돌아갔던 알바가 생각난다.
시간을 멈출수는 없듯 어느새 여느때처럼 노란 오후빛이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탁신두 라(Thaksindo La)에서 시작해 오늘은 람주라 라(Lamjura La)에서 하루의 끝을 맺고 싶으나 시간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다.
다 못가면 또 어떠랴, 그냥 구불구불한 선 위에서 하루 묵어가는 작은 점을 찍으면 될 것을...
괜한 욕심으로 몸이 지치는 것 보다는 나은 선택이다.
붉게 물드는 땅에 드리워지는 기다란 그림자들이 이제 밝은 세상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평소였으면 랄리구라스 나무들이 석양빛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찬찬히 구경하겠지만 된비알이 끊임없이 람주라 라(Lamjura La)로 이어지는 길 위이서 도중에 해가 져 버릴까봐 안절부절이다.
게다가 한참 전부터 인가는 커녕 오가는 사람들조차 없다.
오르막에 지친 다리를 쉬게 하려고 배낭을 내려놓고 이끼 덮힌 푹신한 바위에 앉으니 꽤 근사한 숲의 모습이 그제야 들어온다.
랄리구라스 꽃이 온 숲에 활짝 펴 있다면 정말 근사할 듯 하다.
마치 안나푸르나나 헬람부에서 처럼...
빛이 사라진 어슴푸레한 응지의 오르막을 한참 오르다보니 그 끝에 시야가 탁 트이는 나직한 경작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람주라라(Lamjura La)였다면 좋겠지만 좀 더 가야 한다.
간간히 나오는 랄리구라스 꽃과 잠시 스쳐지나는 트레커 한명이 그나마 이 적적한 길을 외롭지 않게 만든다.
경사가 심하지 않은 땅에는 항상 인간의 손길이 닿은 뭔가가 존재한다.
집이라든지, 경작지라든지, 목장이라든지, 스투파라든지...
평지를 접하기가 워낙 힘든데다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이같은 초기 문명에 필요한 설비들을 쉽게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안나푸르나 지역 울레리에서 만난 한 소년이 평지에서 공을 차 보는게 소원이라 말했던 게 생각난다.
람주라 라(Lamjura La)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한참 기울어서 진한 붉은 빛으로 온통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름답게 하루의 끝을 알리며 진한 여운과 감동을 안겨줬던 캉테가(Kangtega)의 마상도 지금쯤 이렇게 아름답게 빛나고 있겠지?
푸모리(Pumori)도, 링트렌(Lingtren)도, 초오유(ChoOyu)도, 아마다블람(Amadablam)도 그 모습을 지금 여기에서 볼 수는 없지만 분명 그렇게 빛나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어느 여행자의 가슴도 붉게 붉게 물들이고 있으리라!
고개를 넘자마자 롯지가 하나 나오는데 텅 비어있고 새끼 검둥이들만 이리저리 앞마당을 헤집고 다닌다.
주인장을 기다리면서 하루 묵어갈까 잠시 생각하다가 느낌이 별로 안좋아서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해도 곧 넘어갈거 같고 배도 고프고 다음 롯지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무모한 행동에 더 가깝다.
마치 가장 확실한 자산을 아주 불확실한 곳에 투자하는 도박이나 복권 같다고나 할까...
분명 주인장은 기다리다보면 나타날 것이고 하루를 묵어갈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텅빈 롯지만 '불가'로 인지하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다음 롯지의 '가'를 찾아 나서다니...
롯지 간판을 살펴보다가 해발을 보고는 잠시 놀란다.
저 위 EBC트레킹 지역에서는 4,000m, 5,000m도 그리 놀랄만한 고도도 아닌데 이 저지대에서 3600이라니...
그러고보니 루클라(Lukla) 이후 람주라라(Lamjura La), 탁신두라(Thaksindo La), 카리라(Khari La)세개의 라(La)를 넘었다.
라(La)는 컨디션이 좋든 나쁘든 언제나 힘든 고갯길이다.
꽤 큰 면적으로 어떤 구조물을 올리기 위한 기둥을 만들고 있다.
지천으로 널린게 돌이니 아마도 여기에서 석공들이 돌을 다듬어 바로바로 쌓아올리고 있는 듯 하다.
많은 세월이 흘렀기에 지금쯤은 어떤 건물이나 구조물이 생겼겠구나...
그나저나 다음 롯지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나지 않아 불안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이번 트레킹에서 이렇게 어둑한 길을 걷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잠잘 곳을 정한 다음에 마실삼아 다니는게 아니니 그야말로 최악에는 노숙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미리 헤드랜턴을 꺼내두고는 빠른 걸음으로 내달리다보니 다행히 저만치 앞에 건물 하나가 어슴프레 보인다.
무모한 도박 덕분에 잠시 심장이 쫄깃해진 경험이었지만 어쨌거나 살았다!
롯지에 도착하자마자 해는 곧 넘어가 버린다.
어제만큼이나 오늘도 고단한 하루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공통점이라 할만한게 하나 있는데 바로 하루 하나씩 라(La:큰 고갯길)를 넘어왔다는 것이다.
방 배정을 받고 저녁으로 달밧을 주문했는데 롯지 주인장이 계속'엑' '엑'을 외친다.
뭐라고 하는 건지 잠시, 아니 한참 그 의미가 뭔지 생각하다 내뱉은 말이
"I don't Know, I Can't understand"
였다.
순간 롯지 주인장은 의아해하며 '꼬꼬댁' 소리를 낸다.
아... 이런 바보가 여기 있구나...
살다보면 가끔씩 아주 친숙한 단어나 말이 전혀 무슨 뜻인지 몰라서 갸우뚱하는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주 예전 무려 대학생 시절 버스에 커다랗게 붙여놓은 'GAME'이라는 단어를 보고 '가메'가 뭐지 했던 그때처럼!
영어를 잘하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젬병도 아닌데 말이다.
멋쩍게 웃고는 대바구니에 한가득 있던 삶은 계란도 대여섯개 주문해서 소금에 찍어 먹었는데 꿀맛이다.
연이어 나온 달밧도 꽤 맛있어서 리필 두번으로 텅빈 배를 채웠다.
간밤에는 오줌 누러 나갔는데 온몸이 덜덜 떨렸을 정도로 추워서 황급히 침낭으로 복귀했다.
어제는 어두워서 어떻게 생긴 롯지인지도 모른 채 들어왔는데 아침에 보니 조그맣고 낡은 오두막 느낌이다.
그래도 포근하게 숙면을 취한 것 만으로 제 역할을 다 했으니 만족한다.
사람들이 붐비거나 소란스러운 크고 깨끗한 롯지보다는 작고 흐름하지만 조용한 롯지가 내게 맞다.
더불어 음식이 맛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지도를 보니 오늘은 온종일 내리막길로 예상된다.
켄자(Kenja)에 머물지, 혹은 지나칠지 모르겠으나 3,600m에서 1,600m로 고도가 무려 2,000m 가까이 떨어져 버린다.
직선거리로 2,000m야 얼마 안되는 거리지만 트레킹 중, 게다가 오르막이라면 온갖 험한 말이 튀어날 정도로 힘든 구간이다.
내려가는 길이라 부담이 아예 없지만 만일 지리(Jiri)에서 출발해 오르는 길이라 생각한다면 끔찍할 것 같다.
이제부턴 신나게 아래로, 아래로 내달려보자.
지도상에도 더이상 라(La)는 없다!
내려갈수록 낮기온은 조금씩 올라가고 습도도 올라간다.
그리고 만년설은 더욱 멀어지고 최종 목적지는 조금씩 가까워진다.
길가에는 듬성듬성 보이던 꽃들이 아예 한 무리를 이뤄 꽃밭을 만들어 놓은 곳도 종종 만나는데 이 노란꽃들 역시 다이어리에 곱게 수집해 놓는다.
이 꽃들의 마지막 결말은 앞서 말한 대로다!
누군가의 보금자리였던 곳은 허물어지고 언제부턴가 자라난 이끼들이 한쪽 벽면을 덮어버렸다.
붉은색 털뭉치들이 마치 누렁이 소의 털 같은 느낌이다.
점심을 먹기엔 이르지만 그 새 배가 고파져 간단히 뭐라도 사먹을 요량으로 허름한 가게안에 들어갔다.
어떤 영화의 제목처럼 스니커즈는 안되고 인도산 비스킷은 된다!
순간 얼굴이 붉어졌는데 고등학생 정도로 앳되보이는 여자애가 가슴을 드러내 놓고는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낮선이, 그것도 외국인인 남자가 들어 오는데도 이 아이는 갓난애를 얼르며 젖을 물린채 내게 고개를 갸우뚱(물음의 의미)한다.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 손으로 비스킷(이거 꽤 많이 먹었다 노란 봉지에 쌓인 인도산 크래커인데 가격도 무지 싸다)을 가리키니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한개? 두개? 하는 시늉을 낸다.
한 봉지만 사야 하지만 엉겁결에 손가락 두개를 폈고 계산을 마친 후 비스킷 한봉지를 이 소녀에게 건내며 먹으라는 시늉을 냈다.
말을 아예 못하는 건지, 아니면 단지 영어를 못하는 건지 알수는 없었으나 이곳을 떠날 때까지 나는 이 어린 소녀의 음성을 한번도 듣지 못했다.
비스킷을 받아 든 말없는 소녀의 작은 미소와 젖을 빨고 있던 갓난아기를 떠올려보면 이상하게도 눈에서 따뜻한 물이 조금 나온다.
어제까지는 오르막이 문제더니 이제는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다.
경사가 덜한 곳이야 수월하지만 심한 곳은 무릎이 아파온다.
배낭 무게는 분명 트레킹을 출발하던 때에 비해 많이 줄었다.
문제는 의류다.
입고 다녔던 가을겨울 옷들을 몽땅 싸 짊어지니 무게가 엄청나게 늘었다.
내 몸이 인식하는 총 무게야 볌함없겠지만 이게 다리에, 팔에, 여러 몸의 부분에 분산되는게 아니라 배낭에만 집중 되다보니 어깨와 허리가 아프다.
게다가 이 무게를 지탱하는 무릎에도 영향이 많이 간다.
오르막만 나올때는 내리막을 바랬지만 내리막만 나오니 평지를 바라게 된다.
켄자(Kenja) 이정표가 보이는 걸 보니 2,000m고도 내리기가 끝나가는 모양이다.
숙박비가 10루피, 핫샤워가 10루피 라는 글을 보니 너무너무 매력적이다.
한국돈으로 200원이 안되는 가격이다.
경치가 어떨진 모르겠지만 체류비가 거의 들지 않을 듯 하다.
물론 식비가 지출되겠지만 이미 이곳은 카트만두 같은 대도시의 로컬식당(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수준에 근접해 있다.
이제 갓 정오를 넘어서는 시간이라 켄자(Kenja)에서 점심을 먹는다.
비교적 깨끗한 롯지인데다 다이닝룸의 식기들도 잘 정돈되어 있고 무척 정갈해 보인다.
게다가 점심으로 주문한 프라이드라이스(볶음밥)도 아주 맛있다.
만일 내게 아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하루나 이틀 머물만한 곳으로 정할수도 있을듯...
롯지주인장에게 쉬발라야(Shivalaya)나 지리(Jiri) 도달시간에 대해 물어보니 지리(Jiri)까지는 먼 거리고 쉬발라야(Shivalaya)까지는 충분한 거리라고 한다.
그리고 쉬발라야(Shivalaya)에는 무려 카트만두까지 버스도 다닌다고 한다.
긴 여행 속 짧은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가 이젠 눈앞에 성큼 다가와 버렸다.
내리막의 정점을 찍었던 켄자(Kenja)에서부터 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오르막과는 그 기분이 많이 다르다.
이제 곧 이번 트레킹이 마무리 되고 나는 또다시 카트만두라는 문명세계로 돌아가 다음 여정을 준비하겠지만 내가 걸어온 이 길은 하나의 과거로만 남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쉬움과 서글픈 감정들이 머리속에 맴돈다.
하지만 끝날때 까진 끝난게 아니다!
내가 두 발로 거닐고, 두 손으로 만지고, 온몸으로 느꼈던 그 차가운 빙하와 눈들이 모이고 모이고 모여 이곳까지 흘러들었다.
어쩌면 저 위에서 따먹던 고드름 부스러기나 간밤에 뛰쳐나와 급하게 본 소변일수도 있겠지?
이 강을 보고 있으면 시작은 볼 수 있었지만 그 끝은 결코 알 수 없는, 열린 결말의 영화 한편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강은 대양으로 흘러들어 다시금 저 위에 있늘 누군가에게 만져질 빙하가 되고, 따 먹힐 고드름이 되고, 신발에 밟히는 눈이 되고, 오밤중 급한 소변이 되겠지만 이 자연의 거대한 순환은 머리로는 이해가 될 지언정 마음으론 이해되지 않는 난제인것 같다.
로컬포터들의 쉼터에 나도 배낭을 내려놓고 길게 이어지는 오르막길 중간에서 잠시 쉬어간다.
시원한 물 한잔으로 목을 축이는데 잘생긴 백인 한명이 어디선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내게 다급하게 '%¢#$¥@±€'라고 한다.
잘 들어보니 오는 길에 혹시 카메라 하나 줍지 않았냐면서 캐논익시 뭐라뭐라고 하는데 아마도 여기서 카메라를 잊어 버렸나보다.
그러면서 자신도 EBC와 고쿄(Gokyo)를 거쳐서 지리(Jiri)로 내려가는 중인데 정말 소중한 추억들이 담긴 것이라 꼭 찾아야 한다면서 내가 올라왔던 길로 또다시 잰 걸음으로 주위를 살피며 빠르게 내려가 버린다.
내게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낭패다!
다이어리에 일기를 매일 적긴 했지만 카메라로 담았던 당시의 모습들을 영원히 잃어버릴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카메라 메모리는 12개 가져왔는데 벌써 7개가 용량이 다 차서 이것들을 여권지갑에 넣어뒀다.
카메라라면 도난의 위험도 있고, 분실의 위험도 생각해야 겠지만 메모리야 설마 잃어버리겠나 싶어 대충 작은 지갑에 넣어뒀는데 오늘 저녁때는 수량 확인 후 좀 더 안전하게 보관할 만한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보관을 아무리 잘해도 전혀 엉뚱하게 백업하드디스크가 맛가는 경우도 있지만...
디지털카메라가 나오기 전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던 시절(물론 지금도 필름카메라를 고집하는 사진작가들이 있다)에는 장기 여행시 필름관리가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니콘FM2와 아사히펜탁스MX를 써 봤지만 이번 여행에서 찍은 어마어마한 분량의 사진을 이놈들로 찍었다고 생각 해보면 필름통만 한보따리가 될 듯 같다.
게다가 필름값이며 현상비며 망한 사진들이며 손실도 어마어마했겠지...
비록 한장 한장 정성스레 이리 설정하고 저리 돌리며 장고 끝에 셔터를 누르는 맛은 없다.
촬영한 후에도 현상하기 전까지 사진이 어떻게 나왔을까 하며 마치 복권을 쥐고 추첨일까지 애타게 기대리는 마음처럼 설레고 기대하던 그런 감성도 없다.
컷수도 정해져 있고 성공작인지 실패작인지 현상 전에는 알수조차 없다.
이에반해 디지털카메라는 단지 어마어마한 메모리용량을 다 채울 때 까지 마음껏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되고, 설사 다 채웠더라도 새메모리를 갈아 끼우기만 하면 조금전의 셔터놀이를 다시 이어갈 수도 있다.
게다가 촬영한 사진도 바로 확인, 삭제 가능!
내게 필름과 메모리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한치 망설임 없이 메모리를 선택할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필름값과 현상비 때문이다!
그래도 필름카메라 쓰던 시기에 비해 소홀히 찍지는 않으려고 '노력'만은 항상 한다.
아무튼 분실한 카메라가 잘생긴 백인청년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갔기를 빈다.
네팔의 로컬포터들이 사용하는 스틱은 우리네 지겟작대기에 비해서 짧고 굵으며 뭉툭하다.
게다가 묵직하기까지 한데 온통 경사가 급한 산간지대다 보니 이동중에 직접적(수직으로)으로 힘을 전달하기 위해 이렇게 짧고 단단한 형태가 된게 아닐까 짐작이 된다.
주위에 인가도 없는 외진 곳인데 잡화점이 있다는게 신기하다.
물품 이래봐야 간단한 의류 몇 가지와 조악한 중국산 장난감이나 생활용품이 전부지만 손님이 마침 한명 온 걸 보니 장사가 되긴 되는 모양이다.
아까의 오르막 쉼터에서 만났던 로컬포터들과 설렁설렁 내리막을 걷다보니 어느새 경사지는 끝이나고 넓다란 평지에 마을이 나타난다.
반다르(Bhandar)인데 여기서 쉬발라야(Shibalaya)나 지리바자르(Jiri Bazar)는 지척이다.
보통 아침일찍 장거리 버스가 출발하는 걸 감안하면 어쩌면 내일 아침 카트만두로 떠날수더 있겠다.
여러가지 감정들이 뒤섞여 머리가 복잡해진다.
어느 롯지에 들어가 주인장에게 카트만두행 버스시간을 문의 해보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친절하게도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확인해준다.
그런데...
쉬발라야(Shivalaya)든 지리(Jiri)든 버스예약이 다 차서 내일은 떠나지 못하고 모레 아침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시골에서 장거리 버스가 설마 다 차겠나 싶었는데 낭패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카트만두에서 랑탕의 샤브루베시 갈때도 만차로 출발했으니 그럴수도 있겠다.
왜 예약이 다 차서 며칠 미뤄질수도 있다라는 걸 생각 못했을까?
설사 알고 있었다고 한들 어차피 결과는 바뀌지 않겠지만 원해서 하루를 묵어가는 게 아니라 교통편때문에 하루를 소비한다는 건 역시 아깝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루클라행 비행기가 안 떠 3일만에 겨우 출발한 것에 비하면 그래도 낫다고 해야하나?
더 가봐야 아무 의미가 없으니 그냥 반다르(Bhandar)에 주저 앉는다.
롯지주인장에게 혹시 버스편 예약 같은 것도 가능하냐고 물어보니 흔쾌히 해주신다.
이제 내게 남은 일정은 내일 쉬발라야(Shivalaya)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가며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것만 남았다.
지리바자르(Jiri Bazar)도 오전 중 도착하는 거리이지만 그냥 꼬리는 잘라 버리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요 며칠 더위에 너무 지쳤다.
아침에 한번 더 롯지 주인장을 통해 버스예약을 확인했다.
가끔씩 예약만 하고 중간에 돈을 가로채거나 아예 예약조차 하지 않아 트래커들을 골탕먹이는 경우가 종종있다.
실제 여행자들의 집합소라 할 수 있는 카트만두의 타멜거리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정보를 교류하다 보면 이 같은 경험을 이야기하며 쓴웃음을 짓던 사례를 몇 번 겪었다.
어차피 수수료도 없어서 먹튀 가능성도 없고 예약도 잘 되어 있다고 하니 안심이다.
약간의 수고스러움에 짧은 감사인사를 전한 후에 쉬발라야(Shivalaya)로 향한다.
그나저나 마을 끝에 있는 작은 스투파에 새겨진 부처의 얼굴이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가만히 보니 미간의 혜안이 빠져있다.
기단을 장식하는 석판에 보통은 불경의 한 구절이나 주문 같은 문자를 새겨 넣는데 가끔씩 그림이나 특이한 문양을 새겨 넣는 경우도 있다.
산스크리트어나 힌디어에 무지한 나로선 이 문자들 마저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가온다.
천천히 산책한다는 기분으로 산자락의 조용한 길을 걷고는 있지만 좀, 아니 많이 심심하다.
'세번째 눈'이 빠져 있던 부처의 얼굴처럼 나 역시 뭔가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다.
'목표'의 '상실'
지도에 표기된 마을 이름을 익히고, 등고선과 고도표를 보고, 멈출 곳과 지나칠 곳을 정하던 작은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다.
이 산을 넘어가면, 이 언덕을 지나면, 이 길의 끝에, 분명 나를 놀라게 할 만한 뭔가가 있을거라는 확신이나 설렘도 없다.
그냥 자동항법장치에 의해 날고 있는 비행기처럼 정해진 길을 걸으며 마지막 끝점을 향해 다가갈 뿐이다.
여행 막바지에는 항상 이런 공허함이 소리없이 다가온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을 오래 사용하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
오래된 물건에는 영혼이 깃든다 하지 않던가!
때에 따라서 공포영화에 나올법한 무시무시한 소재가 될 수도 있지만 나는 함께 같은 세월을 보내며 낡아지고 헤지고 닳아가는 모습과 과정이 너무 좋다.
영락없는 '옛친구' 딱 그 느낌이다.
한참 혼자서 이리저리 다니며 잘 놀더니 주위에 자신을 보호해 줄 누군가가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채고는 금새 울먹인다.
보기 안스러워 내가 잠시 얼르고 달래보지만 소용없다.
아침에 간식거리로 챙겨왔던 예의 그 인도산 비스킷을 꺼내 손에 쥐어주니 놀랍도록 빠르게 울음을 그치고 과자를 먹는다.
너무 잘 먹어서 아예 봉지채 줬더니 누가 뺐어 갈까봐 두손으로 꼭 쥐고 하나씩 몰래 빼먹는다.
애들에게는 역시 과자가 최고의 미끼인거 같다.
무용지물과 계륵사이에 놓인 아이젠이다.
그렇다고 전혀 쓸모없진 않았다.
닭의 갈비뼈라도 배고프면 뜯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트레킹 일정동안 딱 한번, 굳이 안써도 되지만 쓸 경우엔 아주 조금이나마 편하니 귀찮지만 착용했었다.
이 쇳덩이를 일정 내내 지고 다닌게 조금 억울하다.
만일 촐라채스(CholaPass)를 경유했다거나 눈이 더 많이 왔었다면 가져간 보람이 있었을텐데...
지금은 당장 버리고 싶은 물품 일순위이다.
쉬발라야(Shivalaya)에 도착해 버스예약건을 확인하니 OK란다.
내일 아침 6시 출발예정이며 5시30분부터 탑승, 이후 저녁 6시 정도에 도착하는 12시간짜리 지옥행 버스다!!!
왜 지옥행인지는 산간지역의 장거리 버스(인도든, 티벳이든, 중국이든, 네팔이든) 게다가 리무진이나 전세 관광버스가 아닌 로컬버스를 타 본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알 것이다.
더불어 인도산 타타버스라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
혹시라도 늦잠 때문에 버스 못탈까봐 정류장(이라고도 부르기 민망한 좁은 공터) 바로 옆에 있는 롯지에 배낭을 내려 놓고는 하루를, 그리고 이번 트레킹을 정리한다.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얻고, 버리고,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그리고 사진으로, 편지로, 다이어리로, 머리로, 가슴으로 이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시간들을 주워 담았다.
원래의 예정이라든지, 허비된 시간이라든지, 일정의 변경은 이제 그 중요성를 잃었고 오직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되돌아 간 시계바늘은 또다시 새로운 곳을 향해 째깍째깍 돌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잘 놀다 간다!
그건 그렇고...
지금까지 어떤 지역에서든 한번도 롯지의 침구류(덮는)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뭐에 이끌렸는지 처음으로 롯지의 이불을 이 날 사용했다.
이 선택은 곧 '비참'하고 '참담'한 결말로 이어진다.
아침 5시부터 시끄러운 버스 경적소리가 기상나팔소리처럼 작은 시골마을에 울려퍼진다.
주기적으로, 혹은 리듬까지 타면서 울려대는 통에 지각 할래야 할수가 없을것 같다.
아마 버스가 곧 출발하니 어서어서 모이라는 신호일테지만 정류장 바로 옆 롯지를 잡은 내겐 엄청난 고통이다.
찰라리 저 멀리 마을 외곽에 묵을껄 그랬다.
짐을 챙겨 버스앞에 왔지만 6시 출발시간은 역시나 의미 없었다.
아직 빈자리가 너무 많다.
7시가 다 되서야 빈자리를 다 채우고 이 경이로운 타타버스는 검은 연기를 켁켁 거리며 십여분 토한 후에야 카트만두를 향해 바퀴를 서서히 굴린다.
안녕~
길위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여~
뭐 예상대로 두어시간 가다가 한번 퍼지고, 지리(Jiri)를 지난 직후 또 한번 퍼져서 카트만두 도착예정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변화 속에선 그냥 순응하는게 최선이다.
닭장같이 좁은 버스안에서 쿠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나무 의자에 쪼그리고 있는 것 만으로도 고역이다.
게다가 버스바퀴가 일으키는 흙먼지가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와 머리카락이 황색으로 물들어간다.
뚤훍뚤훍뚥 뚤훍뚤훍뚥 뚤훍뚤훍뚥 따다다 돌날라봤자 뚱배발이빠순이
그러거나 말거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인도풍 음악이 귓속을 맴돌고 버스바퀴는 그래도 그럭저럭 굴러가며 카트만두까지의 거리를 좁혀나간다.
중간에 소나기가 두 번 정도 내렸는데 버스 지붕위에 있는 배낭이 조금 걱정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난 지옥버스에 탑승한 것을...
장장 12시간을 달려 카트만두 외곽에 도착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온통 칠흙같은 어둠에 도시가 휩쌓여 있고 거무튀튀한 건물의 외형들만이 마치 떠다는 유령들처럼 희미하게 창밖을 스쳐 지나간다.
블랙아웃!
네팔에서 정전은 흔한 일이고 타멜에서도 자주 겪어봤지만 달리는 차 안에서 빛이 사라진 도시를 바라보니 영락없이 재난영화의 한 장면, 그 속에 있는 기분이다.
검은 도시의 입 속으로 한참 들어가던 버스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어느 정류소에서 멈추고 그 속의 승객들을 모두 토해냈다.
버스 지붕위의 배낭을 내렸는데 흙먼지와 소나기의 손길이 참 아름답게 배낭을 물들여놨다.
중요한 건 지금 내 몸뚱이도 이 배낭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상하의 검정색 옷이 옅은 황색이 되어있다.
가능한 빨리 씻고싶어 헤드랜턴을 꺼내 머리에 쓰고는 큰 도로로 다시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외친다.
Go Thamel!
타멜의 건물들은 여기저기 소형발전기를 돌리는 곳이 있어 그래도 문명의 혜택인 전깃불이 군데군데 있지만 여전히 열에 아홉은 불이 꺼져있거나 초나 손전등에 의지한다.
자주 묵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카운터에 배낭을 내려 놓으니 긴장이 한번에 다 풀린다.
12시간 로컬버스 타는 건 역시 보통일이 아니다.
게스트하우스 관리인이 흙먼지를 뒤집어 써 머리가 누런데다 파란색 버프도 누렇고 옷도 누렇고 배낭도 누렇고 어디 걸뱅이 하나가 굴러 들어왔나 하는 눈치다.
버프를 벗고 얼굴을 내미니 그제서야 알아보더니 어디 전쟁터라도 다녀왔냐며 웃으면서 키를 내준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먼지 풀풀나는 옷 죄다 벗어던지고 샤워를 하는데 황색 물줄기가 바닥을 흐르고 있다.
구석구석 씻을 정성도, 체력도, 시간도 없다.
대충 흙먼지만 씻어낸 후 후다닥 식당으로 가서 근 보름동안 머릿속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음식인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이 맛은...
글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늦은 저녁을 먹고는 방으로 돌아와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내가 다녔던 모든 여행을 통틀어 가장 뼈아픈 기억을 하나 얻었다.
바로 빈대!
쉬발라야(Shivalaya)에서 머물렀던 마지막 롯지는 빈대 천국이었다!
덕분에 내 다리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모든 일정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이 가려움은 6개월이상 지속되었다.
참고로 가려움의 강도는 모기의 100배에 해당하고 더욱 무서운 건 긁어도 하나도 안시원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지는 저 마다의 그릇은 크기나 모양 모두 다를 것이다.
어떤 그릇은 크고, 어떤 그릇은 작고...
어떤 그릇은 깊고, 어떤 그릇은 얕고...
그릇이 크면 가득 채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릇이 작으면 조금만 채워도 넘쳐버린다.
그릇이 크면 다 채우기 위해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으며, 그릇이 작으면 소박한 즐거움으로도 일생이 행복할수 있다.
여행 관련해서 책이나 매스컴을 통해 표현되는 건 어차피 그걸 만든 작가들의 생각일 뿐이다.
그들은 내가 아니며, 이 글을 읽고 있을(없을수도) 누군가 또한 내가 아니다.
각자의 그릇이 다 다르듯 트레킹이든, 여행이든 그 경험을 통해 담고 버리는 것 역시 모두가 다를 것이다.
그냥...
어디의 길이든 그냥 떠나 보라고 말하고 싶다.
가깝든... 멀든...
-끝-
이로서 EBC, 고쿄, 지리바자르 트레킹 마지막편을 마칩니다.
아직 두 지역이 남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당분간 트레킹 글은 못 올릴 것 같습니다. 뭐 언젠가는...
그동안 모자라고 부족한 긴 글(이 글 포함) 읽어주신 분들께는 감사인사 드립니다.
보너스 트랙으로 네팔여행 다녀온 직후에 쓴 트레킹 후기글 첫 부분만 한번 올려 봅니다.
2010년 즈음 게시판에 올리기 위해 90부작으로 열심히 쓰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젠 올릴 일이 없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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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트랙 시작
<2월 13일> 봄동 무침과 고양이
여행이란 두 글자는 언제나 나에게 기대와 호기심으로 다가오지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부분의 익숙한 것들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면에서는 약간의 두려움과 상실감도 가져다준다.
내일 출국에 앞서 몇 번씩이나 점검 했었던 준비물들의 목록을 다시 한 번 훑어보면서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다.
물론 이번이 멀리,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떠나는 첫 번째 여행은 아니지만 언제나 마음 한켠 에서는 ‘무엇을 위해’라는 그 목적성과 당위성을 가늠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얽매인 삶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꿈꾸며 세상을 유랑하고 싶어 하지만 이런 나 자신을 보면서 아마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완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을 때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바로 죽음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오전의 따뜻한 햇살이 지붕위의 두터운 눈들을 조금씩 녹이고 있을 무렵, 설 명절을 앞두고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에 잠시 들른 그녀가 향긋한 봄동 무침과 몇 가지 찬으로 도시락을 싸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나를 배웅해 주고 있다는 고마움에 금방 목이 메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순간 이후 당분간 혼자 남겨져야 한다는 불안감에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 그녀를 말없이 안아주고선 이마에 입맞췄다.
‘잘 다녀올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사랑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말들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 짧은 문장들 속에 온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전했다.
도시락을 깨끗이 비우고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그녀를 배웅해 주러 나가는 길에 집 옆의 공터에서 제법 덩치 큰 어미를 따라가는 세 마리의 새끼고양이들을 보았다.
행여 길을 잃을까봐 두 세 걸음 걷고선 뒤를 돌아보며 주위의 온갖 것들에 매료돼 이리저리 장난을 치는 새끼들을 부르는 어미의 울음소리는 조금 전에 들었던 그녀의 나지막한 인사말을 떠올리게 했다.
‘잘 다녀와.’
저 멀리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작은 점이 되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참동안을 나 역시 그 자리에 서서 그 점이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나의 엄마고양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방금 전까지 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녀의 온기는 이미 사라져 버렸고, 차가운 겨울공기로 가득 메워진 그녀의 빈자리가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져, 기분도 전환할 겸 간이매트를 꺼내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늦은 오후의 붉은 빛이 비춰지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물탱크 밑의 콘크리트 처마에서는 녹은 눈들이 한 방울의 물이 되어 투명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고요함.
귀에서 시작된 이 작은 고요함은 마치 잔잔한 수면에 떨어진 빗방울의 울림처럼 이내 머리로, 온몸으로 퍼져 마음 한가득 담고 있었던 부질없는 상념들을 지워버리고 나 자신만을 남겨둔 채 한없이 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어쩌면 내가 찾고 있었던 인생이라는 커다란 여행의 목적이, 내 곁에서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작은 변화들이 가져다주는 하나의 고요함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잠시 동안 누워서 심해로 가라앉았던 마음의 고요함을 뒤로 하고 나른해진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땐 이미 서쪽에서 시작된 태양의 마지막 붉은 빛이 나를 맴돌며 하루의 끝을 알려오고 있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다이어리의 작은 표식을 바라보면서 조금 전 내 눈에 새겨졌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한 번 더 떠올려 봤다.
어디에선가 기다려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삶이 아닐까?
가끔씩 볼을 스쳐 지나는 차가운 바람마저도 내가 머물렀던 곳이며 돌아와야 할 곳의 마지막 체취인 것 마냥 소중하게 느껴진다.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배낭을 점검하면서 상당한 부피와 무게를 차지하는 우모복을 가져갈지를 두고 많이 망설였다.
많은 곳, 특히 한겨울의 산속에서 혼자 자주 지내는 나에겐 든든한 친구이자 잠시나마 그 추위를 잊게 해 주는 집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작은 아이만한 크기의 배낭은 더 이상의 공간을 허락치 않을 정도로 부풀어 있고, 어디에도 이 친구의 자리는 없는 듯 했다.
포터(짐꾼)나 가이드를 고용하지 않는 나에겐 그저 사치처럼 느껴져 그냥 두고 가기로 결정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드디어 떠나는 것이다.
출발 전의 두근거림이 심장을 울려온다.
일정 내내 머릿속에 맴돌 여러 질문들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하는 인생이라는 배낭의 무게처럼 나를 짓누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길도 한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답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번 여행에서 그 답을 얻지 못할지라도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한 다음기회는 또 올 것이기에 그때도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설 것이다.
<2월 14일> 모든 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의 시작.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소리에 간밤의 짧은 휴식에서 깨어나 보니 어느새 침대끝 쪽으로 아침볕이 따스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며칠 전에 대청소를 해서인지 깨끗하게 정돈된 방안의 물건들은 약간의 이질감마저 느껴지고, 그 공간 한 구석에는 커다란 배낭과 함께 TG-657이라고 인쇄된 비행기 표가 놓여 있다.
이 작은 종이 한 장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기대감이라는 흥분제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이젠 정말 그 첫발을 떼는 일만 남아 있는 것이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TV를 켜니, 몇몇 채널들을 제외하고 모두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설날’에 대한 내용들만 쏟아져 나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설날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왜 하필 설날을 출발일로 정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한해의 시작과 여행의 출발이라는 닮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뿐더러 아직 노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부모님의 성화에 대한 도피였는지도 모르겠다.
미리 이번 여행에 대한 사항을 부모님께 말씀드렸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죄송한 마음과 서글픔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몇 년 안에는 사랑하는 그녀와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또 여느 부부들처럼 자신들을 닮은 자식들이 커가는 것을 곁에서 지켜볼 멀지 않은 미래를 생각해 보며 작은 위안을 삼는다.
기분도 전환할 겸 창문을 열었더니 처마 밑의 고드름 사이로 들어온 차가운 공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으로 스며들며 가슴속까지 시원한 느낌을 전해준다.
어제까지 선물꾸러미를 들고 부산히 움직이는 정장차림의 사람들로 채워졌던 거리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커다란 눈사람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하얀 입김을 내뿜고 있는 나의 숨소리만이 현재 내가 느낄 수 있는 세상속의 유일한 소리였다.
한참을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니 마치 내가 몇 년 전에 보았던 ‘나는 전설이다’라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느낌마저 들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까치의 울음소리에 나는 잠깐 동안의 액자 속 사진 같은 정지된 세계에서 벗어나 긴 여행을 앞두고 있는 나그네의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동안 열리지 않을 창문을 잠근 후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정리하니 8시가 막 지나간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모든 물품들을 확인 한 후 가벼운 옷차림으로 배낭을 메고 나만의 공간을 벗어나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경계인 작은 문을 나섰다.
수없이 많은 여행을 다니면서 넘나들었던 이 작은 문은 언제나 그랬듯이 지친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나그네를 그저 말없이 기다려주고 포근하게 안아줄 것이다.
저녁 9시 25분 비행기였지만 호성형과의 약속도 있고, 설날이라 고속도로가 정체 될까봐 미리 예약한 10시 45분발 공항버스를 타기위해 조금 일찍 나섰다.
텅 비어버린 눈 쌓인 도로에 가끔씩 지나는 차들을 몇 십대나 보낸 후에야 겨우 택시를 잡아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할 수 있었다.
룸미러로 옷차림과 배낭을 곁눈질로 쳐다보던 택시기사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던진 여러 질문들에 간략하게나마 답하다 보니 어느새 터미널에 도착해 있었다.
멋진 여행을 하라는 그분의 인사를 뒤로하고 터미널에 들어가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향해야 할 또 다른 목적지를 생각하면서 언 손을 녹이며 난롯가에서 북적이고 있었고, 한쪽에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는 어묵탕의 구수한 향기가 비어있는 위장을 자극했다.
아침 내도록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에 군것질거리가 생각났지만 이내 도착한 공항버스 덕분에 내 위장은 몇 시간 더 비어 있어야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가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고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이번 여행에 대한 일정들을 잠시 잊은 채 그대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연휴정체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버스는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인천공항에 도착했고, 오는 내내 천둥소리를 내던 위장을 잠재우기 위해 공항 내 한식집으로 향했다.
돌솥비빔밥을 시켰는데 사실 그리 뛰어난 맛도 아니었고 딸려 나온 미역국은 너무 짜서 먹지도 못했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한 편은 아니어서 다음부턴 다시는 찾지 않을 곳이 될 것 같다.
아직 비행기 이륙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는데다 멍하니 시간만 보내기 뭣해서 그녀에게 엽서를 적기 시작했다.
1년 전쯤에 20장의 엽서를 한 번에 샀던 적이 있는데 산에 다녀올 때 마다 같이 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에 글을 적어 보내곤 했다.
대부분은 그녀의 손에 전해 졌지만 수개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엽서와 편지들도 있다.
어딘가에서 그녀에게 전해지길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영원히 사라져 버린 기억의 단편들이 되어 버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서운 강풍에 이리저리 춤을 추는 텐트 안에서, 한여름의 뙤약볕을 가려주는 시원한 도토리나무 그늘 아래에서, 붉은 단풍잎들이 느릿한 물살을 따라 쉼 없이 흘러가는 깊은 계곡에서, 순백의 설화가 수놓인 산정상의 양지바른 바위 밑에서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많은 이야기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두 장의 엽서에 또 다시 순간의 기억을 담고서 우체통에 넣으면서 무사히 그녀에게 전해지길 바래본다.
휴대전화를 가져오지 않은 탓에 공중전화부스로 가서 손에 들려진 작은 다이어리의 주소록을 보며 본가와 몇몇 지인들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전하는 것으로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정리했다.
ㅎㅅ형은 저녁 6시 정도에 도착했는데 메인으로 사용할 80리터 배낭을 헤드까지 올린 것도 모자라 60리터 정도 되는 또 다른 배낭도 무언가로 한가득 채우고선, 그 무게에 힘겨워하며 내게 다가오더니 괜히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일정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가이드나 포터를 고용하지 않고 천천히 자유롭게 유랑할 계획이었으므로 짐을 최대한 줄여야 했지만, 이정도의 무게와 부피라면 아무래도 형은 포터를 고용해야 할 것 같았다.
짐 뿐만 아니라 머무는 기간도, 일정도, 가고싶은 곳도 형과는 많이 다르다.
지금 여기에서 고민해봤자 명확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므로 우선 네팔에 도착한 후 정하기로 하고 간단한 저녁으로 칼국수를 먹으면서 그간 밀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8시부터 시작된 티케팅으로 인해 우리가 이용할 타이항공의 안내데스크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국적기를 비롯해 카트만두 직항편도 여러 항공사에서 제공했지만 그리 저렴한 건 아니었고 시간적 여유도 있는 편이라 태국을 경유하는 타이항공을 선택했다. 게다가 많은 노선이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었다.
30여분을 기다린 끝에 나를 낯선 세상으로 인도할 작은 종이 한 장을 손에 쥐고서 출국장을 나와 대기라운지로 향했다.
커다란 유리외벽 너머로는 따스한 느낌을 주는 오렌지색 가로등들이 열을 맞추어 겨울밤을 밝히고 있고, 거대한 금속동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엔진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TV에서는 고속도로 정체상황이나 아침에 본 뉴스, 혹은 예쁜 한복 차람의 인기 연예인들의 화면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며 누군가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밤 9시 25분.
굉음과 함께 시작된 잠깐의 진동은 이내 사라지고, 나는 꿈을 찾아 작지만 선명하게 반짝이는 별빛들이 수놓은 검은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보너스 트랙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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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지역의 기약없는 예고]
안나푸르나 서킷(Annapurna Circ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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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길어져버렸습니다...
그냥 천천히 시간나실때 심심풀이로만 읽어보세요...
글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