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아이다 아이가? 여 만나?"
"아이다. 여 맞을끼다"
젠장... 벌써 몇 시간째 인지 모르겠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광로 같은 태양 아래에는 그 열기에 녹아 엿가락처럼 휘어질듯한 검은 아스팔트만 하늘로 뻗어있다.
이 검은 직선의 길 위에서 우리들은 힘겹게 동그란 테를 굴리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이미 영혼은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죽은 개구리의 뒷다리가 전기 충격으로 움찔거리는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두 다리가 기계적으로 바퀴에 동력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여 아이다 안 카더나! 바다가 안나오고 산만디만 와 나오노. 빠꾸하까?"
"머라카노. 아까 니도 맞다 안캤나. 머 우짜겠노. 가다보마 바다가 나올끼다."
푸른바다, 넘실거리는 파도, 시원한 바람 그리고 경사가 없는 잘 포장된 해안도로...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우리 옆에 있어야 하지만 현실에선 끝없는 오르막의 아스팔트길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나즈막한 산 뿐이다.
그래도 젊음이라는 무시무시한 힘 덕분에 우리들은 용케 자빠지지 않았고, 어느순간 이 오르막의 끝에 도착해 있었다.
자전거에서 내리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고 머리가 어지럽다.
게다가 허벅지는 걸을 때마다 술취한 듯 지멋대로 막 움직이며 갈피를 못 잡는다.
뜨뜨미지근한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치 앞에 뭔가가 우뚝 솟아있다.
"저거 할라산 아이가? 저기 와 여 있노?"
"할라산 맞제? 돌아삐겠네. 우리가 빙시 맨치로 지도 잘몬 밧는갑다. 아몰라 디 죽겠다. 쪼매 싯다가자"
한 10여분 쉬었을까...
카메라의 타이머를 맞춰 추억 한방 박고는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 후 우린 어마어마한 거리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려오며 끽끽거리는 브레이크만 한동안 밟았다.
1994년 여름...
정말 더웠죠...
이때를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게는 살아오면서 제일 무더웠던 여름으로 기억되는군요.
아침에도 덥고, 점심때도 덥고, 저녁때도 덥고, 새벽에도 덥고...
군 휴학 내고 막노동으로 조금 번 돈으로 뭘 할까 싶어서 추억도 만들겸 친한 친구랑 제주도 여행을 떠났는데 첫날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서 한라산 옆구리를 타고 가버린...
원래는 해안도로로 가야하는데 낯선 곳임에도 젊은 혈기에 마구 밟다보니...ㅎㅎ
덕분에 첫날부터 개고생 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만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예쁜 추억으로 남았네요.
짐이래봐야 집에서 쓰던 홑이불, 배게(ㅎㅎㅎ), 부루스타, 라면과 양은냄비가 다였지만 나름 패셔니스타를 꿈꾸며 나이키 티를 세벌이나...
게다가 나이키 등산화에 나이키 배낭까지!!!ㅎㅎ
비는 절대 안올거라 확신했기에 이에 대한 대책은 아예 없었다는!!!
그야말로 아무데서나 은박매트 깔고 이불 덮으면 내집!!!
만일 비가 왔다면 어느 폐가의 지붕밑이나 뭐 그런데서 하루 묵었을듯...
이때 5일인가 제주에 머물렀었는데 하루하루가 재미있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사회복지시설에 들어가 설겆이랑 허드렛일 해드리고 밥한끼와 천장이 있는 곳에서 하루 자기도 했고...
이슬 피하려고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잤는데 그곳이 간이 버스정류장이라 아침 첫차 타러 나온 분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고...
사실 깨어 있었지만 얼굴 보이기 부끄러워 일부러 자는척을...
탑동에서 같이 간 친구의 제주도 친구를 만나서 소주한잔 하는 와중에 이 제주도 친구가 어떤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돌아오는 날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엄청난 기사 덕분에 헌병에게 끌려 갈뻔도 했고...
이때도 산에 곧잘 다니긴 했는데 뭐 전문화된 장비 이런건 없었습니다.
그냥 여름엔 면티, 겨울엔 파카를, 신발은 슬리퍼 신고 가기도 하고 운동화 신고 가기도 하고...
물론 여름에 면티 입고 갔다가 질퍽하게 젖어 옷을 짜가면서 다니기도 했고, 겨울에는 운동화가 젖어 발가락이 끊어질듯한 고통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군요. ㅎㅎ
어릴 땐 지금 같은 좋은 장비가 없었음에도 여기저기 산이든 바다든 참 잘 돌아다녔는데 이젠 구색을 다 갖췄음에도 항상 뭔가가 부족하다거나 모자란다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합니다.
그럴때마다 옛날 꼬꼬마시절 떠올리며 모자라도 풍족하게 느꼈던 시절을 떠올리곤 하죠.
저보다 훨씬 선배분들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이제 봄꽃이 지천으로 산을 물들이는 계절이 왔으니 그냥 가져운 차림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이쁜 산 많이 만나러 다니시고 즐거운 추억들도 많이 만드시길 빕니다^^
저번주 3주 연속으로 부산 가려고 했는데 날이 안좋아 포기, 근데 이번주도 날이 안좋네요.
비오든 말든 마눌이랑 그냥 뒷산이나 다녀와야겠습니다.ㅎㅎ
아래로는 사진첩보다가 생각나서 스캔해본 그때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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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장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