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에서는 또다른 중화, 동중화('동방의 중화' 라는 의미입니다.), 소중화(전세계에서 중국 다음가는 선진국이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본 뜻은 중국에 비해 상대적인 규모가 작을 뿐,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은 중국과 동급이라는 의미이며, 중화와 본질적으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용어들을 두고선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만의 자칭에 국한된 것이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들만의 자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인준된 특수 용어죠. 즉, 자의식과 타의식이 일치되온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관련 기록들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때 올량합(兀良哈)의 유상동합(柳尙冬哈) 등도 또한 좌중에 있었는데, 신이 가상합(加霜哈)에게 말하기를, ‘너는 야당기(也堂其)에게 돌아가서 말하기를, 「우리 성상(聖上)께서 신무(神武)하시어 화난(禍難)을 평정(平定)하고서 동하(東夏)를 무육(撫育)하시고 사방(四方)을 정수(靖綏)하여서 이속(異俗)의 종족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나라 사람과 같이 하며, 구악(舊惡)을 모조리 떨쳐 버리고 멀거나 가까운 곳이 없이 친자식같이 보호한다는 말을 또한 너희들도 들어서 알 것이다. 지금 듣건대, 야당기(也堂其) 등의 처자(妻子)가 올량합(兀良哈)에게 죽거나 사로잡혔다 하니, 〈성상께는〉 그들이 죽거나 유리(流離)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나에게 명하여 올량합(兀良哈)을 타일러서 그들의 사로잡은 자를 돌려주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각각 전의 원한을 떨쳐 버리고 화해(和解)하도록 하셨다. 너희들도 와서 명(命)을 듣는 것이 가하다. 너희들이 비록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기를 꾀하고자 하지만, 너희가 지금 보건대, 이러한 무리들이 모두 우리의 근경(近境)에 살면서 우리 나라에 출입하고 충성하고 순종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과 같이 하는데, 변장(邊將)이 어찌 모른 체하고 방관(傍觀)하겠는가? 하물며 내가 이곳에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너희가 어찌 반드시 이익을 보리라고 기필(期必)할 수 있겠는가? 무릇 일을 당하면 시기를 놓칠 수 없는 것이니, 와서 왕지(王旨)를 듣고 처자(妻子)를 데리고 돌아가서 각각 생업(生業)을 평안히 하면서 자주자주 조현(朝見)하여 성상(聖上)의 은택(恩澤)을 받도록 하라. 성상께서 너희들을 대접하는 데 어찌 멀고 가까운 곳이 있겠는가? 만약 어기면서 무례(無禮)하게 항거하면, 올적합(兀狄哈)의 땅도 또한 수일정(數日程)의 거리에 지나지 않으니, 후회(後悔)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명을 받들고 와서 방비(防備)를 정리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끝마쳤으니, 또한 이곳에 오도록 머물지 않을 것이다. 올려면 마땅히 속히 오라.」고 하라.’ 하였더니, 가상합(加霜哈)이 말하기를, ‘상위(上位)께서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연휼(憐恤)하시니, 은혜가 실로 지극히 무거운데, 누가 감히 오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세조실록15권, 세조 5년(1459년) 3월 10일 임진 2번째기사
여기에서 '동하' 는 동방의 하나라 곧 '동방의 중화' 를 의미합니다.
일본국(日本國) 인백단 삼주 태수(因伯丹三州太守) 산명전(山名殿) 소필(少弼) 원교풍(源敎豐)이 양영 서당(亮瑛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아울러 사서(四書) 각각 1건(件)씩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는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경인년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 신은 비록 먼 하늘, 먼 바닷가의 땅에 있어서 아래에 달려가 마음을 바치지는 못하나, 구구(區區)한 을 엎드려 예찰(睿察)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리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봉지(封地) 안의 백주(伯州)에 만복 선사(萬福禪寺)라고 하는 옛 사찰(寺刹)이 있는데, 허물어져 무너진 지가 세월이 오래 되었으므로 장차 다시 영조(營造)하려고 하여, 저번 때에 상국(上國)에 을 구(求)하였으나,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는 바는 대왕께서 관인(寬仁)으로써 의 봉시를 속히 행하여 주시면, 불각(佛閣)과 승방(僧房)을 일시에 다시 옛날처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길이 성수(聖壽)가 만안(萬安)하시도록 봉축(奉祝)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않은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하였는데, 그 별폭에는,
"활[弓] 2장(張), 백시 동대(百矢同臺) 1대(對), 대도(大刀) 10진(振), 관자 풍로(罐子風爐)·건명분(健茗盆) 2매(枚)."
이었다.
-성종실록32권, 성종 4년(1473년) 7월 26일 을묘 2번째기사
부사(副使, 유구국 사신단 부사)가 후원(後苑)에서 인견(引見)하던 날에 말하기를, ‘내가 중국(中國)과 외국(外國)에 두루 가보지 않는 데가 없는데, 지금 귀국(貴國, 조선국)에 이르니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중화(中華)와 같습니다. 모든 조신(朝臣)들의 거동(擧動)이 복건(福建)의 장락현(長樂縣)의 풍속과 비슷한데 다른 외국(外國)이 미칠 바가 못되며, 임금의 활쏘는 능력도 또한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못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조실록 27권, 세조 8년(1462년) 2월 28일 계사 4번째기사
이는 조선국의 조정에 입조해 조공품과 서계(국서)를 조선국의 조정에 진상한 유구국(류큐국, 현 오키나와) 사신단의 부사가 조선국에 대해 극찬한 기록입니다. 본인이 중국(중국의 명나라)과 외국에 두루 가보지 않은 곳이 없는데, 조선국에 이르니, 조선국의 의관과 문물의 질적 수준이 중화와 동급이며, 조선국의 모든 조신들의 거동이 중국의 명나라의 복건의 장락현의 풍속과 비슷한데, 다른 외국이 미칠 바가 되지 못한다고 언급했지요. 이것을 보면, 조선국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이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이였다는 것을 보다 세세하게 아실 수 있지요.
공용경(龔用卿)이 중국 조정에 돌아가서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문물(文物)과 예의 법제(禮義法制)가 중국과 다름이 없다.’고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문장(文章)이 부끄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부 상서도 공천사의 말을 듣고 감탄해 마지아니하여, 우리 나라 사신을 보고 칭찬하기를 ‘그대 나라의 문물과 예의 법제가 중국과 다름없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하였고, 또 옥하관(玉河館)의 주사(主事)와 서반(序班) 등에게 주의시켜 조선 사람은 삼가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이는 다만, 학문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매일 제술하는 것을 연습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중종실록 86권, 중종 32년(1537년) 11월 3일 무인 3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나라에서 조선국의 예의, 문물의 선진화 수준이 중국과 동급이라고 극찬해왔던 기록들 중 하나입니다.
중궁(中宮)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받고 이어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축하를 받았다. 황제의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우리 조종이 천도(天道)를 봉행하여 인(仁)이 만방을 덮으므로, 봉작(封爵)의 은혜가 멀다고 해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내자(內子)를 추봉(推封)하는 의식은 오직 예의지국(禮義之國)에만 특별히 시행하노라. 성헌(成憲)이 구존하니 잊어서는 안 된다. 너 윤씨(尹氏)는 곧 조선국(朝鮮國)의 배신(陪臣) 윤지임(尹之任)의 딸로서 내칙(內則)을 따라 어진 임금의 계배(繼配)가 되었는데, 내정(內政)에 마땅하고 치화(治化)에 도움이 있으리라. 이에 특별히 국왕의 청을 따라 조선 국왕의 계비로 봉하고 고명을 내린다. 아, 순종함으로 임무를 삼았으니 일찍이 어미의 훈계를 들었고, 경계로 서로 도우니 또한 제사가 내조를 힘입으리라. 언제나 공경하고 삼가 다 같이 아름다운 상서를 맞이하리로다."
하였다. 하사한 관복과 물건은, 주관(珠冠) 1정(頂), 대홍저사협대삼(大紅紵絲夾大衫) 1건(件), 청저사채수권금적계협배자(靑紵絲綵繡圈金翟鷄夾褙子) 1건, 청선라채수권금적계하피(靑線羅綵繡圈金翟鷄霞帔) 1건, 녹세화저사철채수적계단삼(綠細花紵絲綴綵繡翟鷄團衫) 1건, 홍암화저사협오아(紅暗花紵絲夾襖兒) 1건, 청암화저사협군(靑暗花紵絲夾裙) 1건, 아홀(牙笏) 1부(部), 금추두(金墜頭) 1개, 잡색저사(雜色紵絲) 4필, 잡색라(雜色羅) 4필, 서양포(西洋布) 10필 등이다.
-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1518년) 4월 21일 기축 2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 조정에서 자국(중국의 명나라)의 조정에 입조해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조선국에게만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오는 것은 물론, 아예 조선국의 또다른 국호(국명)로 예의지국 곧 최선진국 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입니다. 요새로 치면, 현 우리 대한민국을 두고 대한민국이 아닌 최선진국 이렇게 호칭한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이를 보면, 현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전성기가 아니라, 그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 북한이 우리나라 역사상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최약체고, 그 다음이 현 우리 대한민국이라고나 할까요? 이는 현 중국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만큼, 중국과 한국의 역대 왕조들이 지녀온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이 굉장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현 중국과 한국은 근래에 본격적인 약진을 하면서 이를 본격적으로 복구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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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잘 보시다시피, 또다른 중화, 동중화, 소중화 용어가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의 자의식인 것을 넘어서 대외적으로도 인준되어온 특수 용어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이죠.) 이전 시대 동안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자신들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들에게만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왔고,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들의 규모가 자신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을 뿐,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은 자신들과 동급이며 전세계의 모든 타국들이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극찬을 해오는 것에 이르게 된 거죠(유럽권 곧 유럽-카톨릭권은 로마, 이슬람권은 이슬람, 페르시아[현 이란]권은 페르시아, 인도를 위시한 남아시아권과 베트남의 본류인 북베트남[민족, 문화적으로는 동아시아문명권이죠.]을 제외한 동남아시아~남태평양권은 힌두 그리고 동아시아[동북아시아]권은 중화라는 용어를 최선진국에 해당되는 용어로 사용해왔는데요. 전세계 역사상에서 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이래 기원후 1800년대 전반까지는 동아시아문명권[국가 운영 사상은 유교 곧 유학, 국가 공용 문자는 한문 곧 한자이지요. 중국, 한국이 항상 양대 중심 축이여왔죠.]을 중심으로 한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으로 형성된 국제사회, 국제질서가 변함이 없이 흘러왔으니, '중화' 가 이슬람, 페르시아, 로마, 힌두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인 최선진국 호칭 곧 전세계의 최고 선진국 호칭 그 자체로 여겨진 거라고 할 수 있죠.). 유익한 참조가 되어드렸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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