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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단군이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고조선을 세웠다는 조선 관원의 설명에 대해 반론을 가하지 않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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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접사(遠接使) 허종(許琮)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안관(新安館)에서 중국 사신의 위연(慰宴)을 베풀었을 때에 기악(妓樂)을 올렸더니, 두 사신이 물리치게 하며 말하기를, ‘선황제(先皇帝)의 상(喪) 3년 이내이므로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고, 선위사(宣慰使) 이계남(李季男)이 인정 예물(人情禮物)의 단자(單子)를 올렸더니, 두 사신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를, ‘우리들은 이미 강상(江上)에서도 받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받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또 중국 사신 평양(平壤)에 도착하여, 관찰사(觀察使) 성현(成俔)과 선위사(宣慰使) 이극돈(李克墩)이 영조(迎詔)하고, 채붕(彩棚)을 베풀어 잡희(雜戲)를 올렸더니, 두 사신이 주목(注目)하여 보았으며, 선위사(宣慰使) 이하가 배조례(拜詔禮)를 의식과 같이 행하고, 또 선위례(宣慰禮)를 행하였습니다. 예(禮)를 마치자, 선위사(宣慰使)가 식물 단자(食物單子)를 바쳤더니, 모두 받지 아니하고, 두 사신이 통사(通事)에게 이르기를, ‘이 선위 재상(宣慰宰相)은 예(禮)가 하나도 잘못됨이 없으니, 이 분은 예(禮)를 아는 재상이다.’고 하였습니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기자(箕子)의 분묘[墳]와 사당[廟]이 있습니까? 우리가 배알하려고 합니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분묘는 멀리 성밖에 있어 지금 도달할 수는 없으나, 사당은 성안에 있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알묘(謁廟)하겠습니다.’ 하고, 즉시 기자묘(箕子廟)에 나아가 배례(拜禮)를 행하였습니다. 묘문(廟門)을 나와 단군묘(檀君廟)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는 무슨 사당입니까?’ 하므로 말하기를, ‘단군묘(檀君廟)입니다.’ 하니, 말하기를, ‘단군(檀君)이란 누구입니까?’ 하기에 ‘동국(東國)에 세전(世傳)하기를, 「당요(唐堯)가 즉위(卽位)한 해인 갑진세(甲辰歲)에 신인(神人)이 있어 단목(檀木) 아래에 내려오니, 중인(衆人)이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았는데 그 뒤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죽은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니, 말하기를, ‘내 알고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걸어서 사당에 이르러 배례(拜禮)를 행하였습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동명왕(東明王)의 신주(神主)를 보고 이르기를, ‘이 분은 또 누구입니까?’고 하기에, 말하기를, ‘이 분은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 고주몽(高朱蒙)입니다.’고 하니, 이르기를, ‘단군(檀君) 뒤에 어떤 사람이 대(代)를 이어 섰습니까?’ 하기에, 말하기를, ‘단군의 뒤는 바로 기자(箕子)인데, 전(傳)하여 기준(箕準)에 이르러 한(漢)나라 때를 당하여 연인(燕人) 위만(衛滿) 준(準)을 쫓아내고 대신 섰으며, 기준(箕準)은 도망하여 마한(馬韓) 땅에 들어가 다시 나라를 세웠는데 도읍(都邑)하던 터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단군(檀君)·기자(箕子)·위만(衛滿) 삼조선(三朝鮮)이라고 이릅니다.’ 하니, 이르기를, ‘위만(衛滿)의 후(後)는 한(漢) 무제(武帝)가 장수를 보내어 멸망시킨 것이 한사(漢史)에 있습니다.’ 하고, 즉시 태평관(太平館)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214권, 성종 19년(1488년) 3월 3일 정묘 2번째기사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조선의 관원들과 단군, 기자의 묘를 보면서 문답을 한 기록입니다. 단군은 중국의 역사상 첫 임금인 요 임금(위의 기록에 언급된 '당요' 가 곧 '요 임금' 입니다.)과 같은 시기에 고조선을 수립한 임금으로 기록되어온 임금인데요.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조선의 관원에게 이(단군묘)에 대한 설명을 듣고선 납득을 하면서 반론을 가하지 않은 점이 정말 흥미로운 부분이지요. 기자야 은(상)나라의 제 31대 임금 및 마지막 임금인 주왕의 태사(전담 스승)이자, 은나라 왕실의 왕자였던 기자가 은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무왕에 의해 수립되자, 고조선으로 망명해 고조선의 임금이 되어 고조선인들을 위해 교화를 가감없이 펼쳐 기자조선을 시작시킨 임금으로써 국내외에 공통되게 기록되온 임금이라서 놀랄 것도 없지만 말이지요. 이를 보면, 우리나라가 중국과 역사(문명)의 시작이 같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이에 대해선 아래의 기록들을 더 참조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년) 8월 11일 경신 2번째기사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단군은 (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고, 기자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명을 받아 조선에 봉(封)하게 된 분이니, 역사의 햇수를 따지면 요임금에서 무왕까지가 무려 1천 2백 30여 년입니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1425년) 9월 25일 신유 4번째기사

중국이 황하 문명, 양자강(양쯔 강, 장강) 문명, 이리두(얼리터우) 유적지 등을 토대로 한 요 임금 시대, 순 임금 시대, 하나라 시대 이렇게 역사를 시작했다면, 한국은 요하 문명(발해연안문명, 홍산문명. 이 문명 유적지의 위치를 보면, 고조선의 중심지와 같은 위치이기도 하고, 요하 문명의 중심지에서 출토되는 요하 문명 시기에 살았던 민족 집단의 유골의 유전자에 대해서는 현 한국인들이 가장 유사한 유전자를 지닌 것을 넘어서 완전히 같은 유전자를 지녔다고 연구가 되니 더더욱이죠.), 강원도 춘천시 중도 청동기 유적지 등을 토대로 한 단군조선, 기자조선 이렇게 이어진다고 할 수 있지요. 기자조선에 관련해서도 기자가 고조선으로 넘어와 임금이 된 시기가 기원전 1040년대 즈음인데, 실제로도 중국의 은(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수립되는 시점에 해당되는 은나라 출신 집단의 각종 유적들이 고조선의 중심지에서 대거 발굴되는 중에 있기도 하지요. 조선 시대의 조정에서도 이것과 유사하게 인식해왔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모든 조공(朝貢)하는 오랑캐들이 관문에 이르면, 일일이 〈행장을〉 수검(搜檢)하여, 조그마한 칼도 가지지 못하게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 이르러서는 이를 금하지 않았고, 돌아올 때에도 동팔참(東八站) 일로(一路)에서 특별히 관군(官軍)을 발하여 호송하게 하시어, 그 대우하심이 모든 번국(藩國)보다 특이하였습니다. 신은 항상 감격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다시 무슨 바랄 것이 있어서, 성은(聖恩)을 다시 바라겠습니까?


-성종실록 83권, 성종 8년(1477년) 8월 26일 경신 3번째기사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이문등록(吏文謄錄)》을 강(講)하다가 중국[中朝]에서 ‘외국인(外國人)의 출입(出入)을 수검(搜檢)하는 방문(榜文)’에 이르러서, 임금이 시강관(侍講官) 이명숭(李命崇)에게 묻기를,

 

"지금 우리 나라 사람이 출입할 때에도 수검을 하는가?"


하니, 이명숭이 대답하기를,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하여, ()로써 대우합니다. 신이 전일에 북경[京師]에 갔을 때 수검한다는 방문이 궐문(闕門)에 걸려 있었는데, 2, 3일 뒤에 곧 철거(撤去)하였으므로, 외랑(外郞)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예부 상서(禮部尙書) 추간(鄒幹)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조선 예의의 나라로서 이것을 보면 반드시 우리에게 마음이 좁다고 할 것이니, 청컨대 보이지 말게 하소서.」하였기 때문에 철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영 신 등이 돌아올 때에도 수검한다는 영(令)이 없었습니다."


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권건(權健)이 아뢰기를,


"신이 한명회(韓明澮)와 더불어 경사에 갔다 돌아올 때에는 수검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였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145권, 성종 13년(1482년) 윤8월 13일 기묘 3번째기사

 

이는 여러분들께서도 잘 보시다시피,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서 자국의 조정(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와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 곧 조선국이 예의지국(전근대 곧 전근현대[근현대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대 곧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들에 대한 통칭입니다.] 내내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동양문명권 정확힌 동아시아[동북아시아]문명권이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이여왔는데요.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고급문화, 고급철학을 두고서 예의, 인의 이렇게 언급해왔죠. 이 동아시아문명권에서는 중국, 한국이 양대 최선진국이여왔지요.)이라고 하여, 예로써 대우한다는 뜻으로 전세계의 모든 나라의 사람들 중에서 오직 조선인들에게만 출입국을 할 때 수검(검사)을 시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의 사람들이 중국의 명나라에서 출입국을 할 때 오직 조선인들에게만 수검(검사)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지요. 이는 그만큼 조선국이 번영, 융성한 나라여왔기에 가능한 혜택들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현 우리 대한민국도 외국에 가서 우리 대한민국의 여권을 보여주면, 외국의 출입국심사대에서 프리패스를 시켜준다고는 하지만, 검사를 안 하지는 않는데(프리패스한 뒤에도 세관검사라는 과정이 국적을 상관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행해지게 되어있습니다. 보안검사도 마찬가지이지요.), 조선국은 오직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출입국을 할 때에 수검(검사)을 받지 않았으니, 현 우리 대한민국에게도 시시하는 바가 크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 기원후 1800년대 중반(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한 시점이지요.)~1900년대 중반의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인 영국,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인 기원후 1900년대 중반 이후의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인 미국도 다른 국가들에게 해주지 않아오는 대접(미국도 자국과 더불어서 영미권의 국가들인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에게 해주지 않은 대접으로 보입니다.)을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조선국은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의 시대 동안 변함이 없이 전세계의 최선진국, 최강대국이여온 중국에게 받아왔던 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이 상마연에서 천사에게 이르기를,

 

"어제 듣건대, 대인(大人)들께서 과인(寡人)을 주공(周孔)에게 비유하셨는데,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독서(讀書)는 반드시 의리(義理)의 정미한 속뜻을 알게 된 다음에야 겨우 학문에 통했다고 할 수 있는 법인데, 과인은 배웠다는 것이 고루하고 노무(魯莽)한 학문이니, 비록 독서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대인들을 만나게 되어 천번 만번이나 희한하고 다행한 일이라 하겠으니, 바라건대 두 분께서 아름다운 말과 좋은 교훈을 가지고 분명하게 나를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또한 차분히 교훈을 받기가 소원입니다."

 

하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학식이 천박한데, 이번에 와서 현명한 왕께서 가지고 있는 덕성(德性)과 학문에 근본한 바가 구비하지 않은 데가 없으심을 직접 보게 되어, 우리들로서는 한마디도 도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제(聖帝)께서 등극[龍飛]하신 첫머리에 두 분 대인께서 명을 받고 나오셨는데, 우리 나라[小邦]에서 반드시 잘못한 일이 많을 것이니, 두 분께서 분명하게 지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매, 상사가 말하기를,

 

"이번에 문헌(文獻)의 나라에 와보니, 위로는 현명한 왕으로부터 아래로 대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예의와 겸양(謙讓)이 풍속을 이루어 법도가 환하게 밝았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그런 속에서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필연(筆硯)과 지묵(紙墨)은 곧 문방(文房)의 미미한 것이므로 비록 가져다 쓰신다 하더라도 염치에 손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매, 두 사신들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우리들이 사리와 법도를 준수할 것으로 알고 차출하여 나오게 된 것이니, 비록 미미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받게 된다면 이는 조정을 속이는 일입니다."


하였다.

 

-중종실록43권, 중종 16년(1521년) 12월 9일 정해 3번째기사

 

이는 조선에 파견된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의 정사가 조선의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이 굉장히 뛰어나 자국(중국의 명나라)이 교화시킬 것이 없다는 극찬을 해준 기록입니다. 이는 굉장히 의의있는 기록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이를 뒷받침을 해주는 기록들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좌의정 최윤덕(崔閏德)과 참찬(參贊) 조계생(趙啓生)과 도승지 신인손(辛引孫)이 사신(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를 의미합니다.)을 벽제역(碧蹄驛)에서 위로하여 보내니, 사신이 인손에게 말하기를,

"전하께서 날마다 예연(禮宴)을 베풀어 주시고, 또 근신을 명하여 멀리 위로하여 주시니 감사한 것은 입으로 다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선은 본래 예의의 나라인데 지금 예악 문물(禮樂文物)을 보건대 중화(中華)와 다름이 없으니, 오로지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입니다."

하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세종실록 68권, 세종 17년(1435년) 4월 3일 갑진 2번째기사

조선국에 파견된 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조선의 조정의 대신들에게 조선국은 본래 예의의 나라(예의지국, 예의지방.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동아시아[동북아시아]문명권이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이여왔는데, 동아시아문명권에선 고급문화, 고급철학을 두고서 예의, 인의 이렇게 언급해왔습니다.)인데, 지금 예악문물을 보건대 중화(중국)과 다름이 없다며 우리나라 곧 조선국을 또다른 중화의 나라로 극찬한 기록입니다.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인 동아시아문명권의 양대 최선진국이 중국, 한국이여온 걸 나타내는 기록들 중 하나인 거죠.

자리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고 잔치가 시작되자, 정사(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가 술잔을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왕의 나라는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중국 조정과 다름이 없으나, 다만 어음(語音)이 같지 아니하여 우리 두 사람이 뜻을 다 전달할 수 없으니, 한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성품이 본래 노둔(魯鈍)하여 비록 중국의 어음을 배우기는 하지만, 두 대인(大人)이 말한 것을 어떻게 다 전할 수 있겠습니까? 과인(寡人) 역시 뜻을 다할 수 없음은 진실로 대인이 말한 것과 같소."
 
하였다.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일찍이 국왕께서 독서(讀書)를 좋아하고 예의(禮義)에 밝으며 중국 조정을 공경하고 현덕(賢德)이 있다고 들은 것이 오래였는데, 이번에 직접 목도(目覩)하니, 모든 시위(施爲)가 모두 들은 것과 부합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을 공경하는 것은 과인이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독서를 좋아하고 예의에 밝고 현덕이 있다는 등의 말은 다만 대인께서 잘못 들은 것이지요."
 
하니, 정사가 말하기를,
 
"그것도 현왕다운 말씀입니다."
 
하였다. 

 

-성종실록265권, 성종 23년(1492년) 5월 29일 무술 1번째기사

 

이 역시 마찬가지인 기록이지요.

 

공용경(龔用卿) 중국 조정에 돌아가서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조선(朝鮮) 문물(文物)과 예의 법제(禮義法制)가 중국과 다름이 없다.’고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문장(文章)이 부끄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부 상서도 공천사의 말을 듣고 감탄해 마지아니하여, 우리 나라 사신을 보고 칭찬하기를 ‘그대 나라의 문물 예의 법제 중국과 다름없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하였고, 또 옥하관(玉河館)의 주사(主事)와 서반(序班) 등에게 주의시켜 조선 사람은 삼가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이는 다만, 학문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매일 제술하는 것을 연습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중종실록 86권, 중종 32년(1537년) 11월 3일 무인 3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나라에서 조선국의 예의, 문물의 선진화 수준이 중국과 동급이라고 극찬해왔던 기록들 중 하나입니다.

 

장녕(중국의 명나라 사신단 정사)이 말하기를,


"금일의 칙서(勅書)는 중국[明] 조정에서 저 사람들을 편드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朝鮮)은 본래 ‘예의의 나라[禮義之邦, 예의지방]’이므로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명 태조 주원장) 이래 본국(本國)을 대우하는 예(禮)가 다른 나라와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 위의 항목의 사의(事意)를 일일이 회주(回奏)하신다면 중국[明] 조정에서 저 사람들을 금지시켜 다시는 원수를 갚는 짓을 행하지 못하도록 할 것인데, 실로 황제 폐하의 지극한 은혜이요, 조선(朝鮮)의 큰 복(福)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머지 사연(辭緣)은 다 회주(回奏)에 쓸 것이니, 대인(大人)은 여러 말 할 필요가 없소."


하였다.


(중략)


장녕이 대답하기를,


"이미 자세히 알았습니다. 중국[明] 조정에서도 조종(祖宗) 이래로 귀국(貴國, 조선국)을 심히 후하게 대접하였으니, 귀국(貴國)의 사신이 이르면, 중국[明] 조정에서 으레 제일 반열(班列)에 위차(位次)하게 하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그러한 일이 없으니 이것이 그 하나이요, 황제(皇帝)께서 신하들에게 연회(宴會)할 때 전상(殿上)에 시좌(侍坐)하니 이것이 그 둘째이요, 귀국(貴國)에서 자제(子弟)를 보내어 입학(入學)할 때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 주원장)께서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것이 그 세째입니다. 그 나머지 대접하기를 후하게 한 것을 일일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중국[明] 조정에서 지금 칙서(勅書)를 내린 것도 사건의 시말(始末)을 알아서 저 사람들을 경계하고 금지하여 와서 난(亂)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고자 함이니, 전하께서는 모름지기 이 뜻을 아시고 명백하게 회주(回奏)하여 주소서."


하였다.


-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년) 3월 2일 기묘 1번째기사

 

또 야인(野人)이나 일본(日本)이나, 삼도(三島)나 유구국(琉球國) 같은 사이(四夷)가 모두 내정(來庭)하였으며, 아름다운 징조와 이상한 상서가 모두 모이어 만물(萬物)이 흔쾌하게 보니, 운수가 형통하고 아름다운 데에 붙어서 오직 소국(小國)만이 왕을 사모할 뿐이 아니고, 중국이 우리 전하를 대접하는 데 이르러서도 그 예(禮)와 그 의(義)는 옛보다 융숭하고, 열국(列國)보다 성대하니, 우리 전하의 공덕(功德)이 성하지 않고서는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삼황(三皇)도 마땅히 도(道)를 양보하고, 이제(二帝)도 마땅히 덕(德)을 양보하며, 삼후(三后)도 마땅히 공(功)을 양보할 것입니다.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년) 3월 25일 乙酉 4번째기사

 

왕무가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 조선을 한 집같이 보아 외국으로 대접하지 않습니다..."

 

-세종실록66권, 세종 16년(1434년) 10월 14일 정사 2번째기사

 

하물며 중국은 우리 나라를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 하여 대접하는 도리가 해내 제후(海內諸侯)와 다름이 없는데...

 

-성종실록46권, 성종 5년(1474년) 8월 24일 병오 4번째기사

 

신의 생각으로는,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가 봉(封)함을 받은 이래로 대대로 예의(禮義)를 지키었고, 중국도 또한 예의를 지키는 나라로 대우하기를 매우 중히 하였으며, 모든 번국(藩國)의 우두머리에 두었은즉, 이제 추봉(追封)하는 명(命)이 또 어찌 우리 나라를 낮추어서 경솔하게 근거없는 일을 하였겠습니까? 또 임금의 일은 반드시 기록하여야 하는데, 기록하고서 법이 될 게 없으면 후사(後嗣)가 무엇을 본보기로 삼겠습니까? 반드시 감히 아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종실록59권, 성종 6년(1475년) 9월 19일 을축 2번째기사

 

"... 그러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대우함에 있어 은혜로 베푸는 예절이 매우 후(厚)해서 하사품도 도타웠는데, 이번 성절(聖節)의 행차에서도 호송군이 3백이 넘는 기병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천자(天子)의 명령이 아니고서 그렇게 되겠는가? ..."

 

-성종실록112권, 성종 10년(1479년) 12월 21일 임신 4번째기사

 

이것은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서 자국의 조정(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와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우리나라 곧 조선국에게만 특례를 변함이 없이 베풀어왔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국의 사신단을 호송할 땐 300명이 넘는 기병대를 동원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 기록입니다.

 

임금이 악차(幄次)에 나아가니, 두 사신이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를 불러 사물(賜物) 주는 것을 마치고 나와 자리[次]에 나아갔다. 임금이 두 사신에게 전(殿)에 오르기를 청하니, 두 사신이 재배(再拜)하거늘 임금이 답배(答拜)하고,

 

"과인(寡人)이 삼가 칙서(勅書)를 읽으니, 이르기를, ‘성교(聖敎)가 미치는 곳은 의당 은택이 미쳐야 한다.’고 하였으니, 내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해(四海)의 밖은 무려 만국(萬國)이 되는데, 우리 나라는 대대로 충성을 돈독히 한다 하여 내려 주신 은전이 편벽되게 융성하고, 또 두 대인(大人)을 선발하여 조칙(詔勅)을 받들고 오게 하시어 황은(皇恩)이 답지(沓至)하였으니, 감격함이 망극(罔極)합니다."


하였는데, 두 사신이 말하기를,


"오늘 현왕(賢王)께서 두 번씩이나 번거롭게 거둥하시니 황공 황공(惶恐惶恐)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강을 건너온 이래로 곳곳에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해 주심을 거듭 받으니, 현왕(賢王)의 두터운 예우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의상 당연한 것인데, 어찌 감사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성종실록 214권, 성종 19년(1488년) 3월 13일 정축 11번째기사

 

중궁(中宮)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 고명(誥命)과 관복(冠服)을 받고 이어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축하를 받았다. 황제의 고명(誥命)에 이르기를,

 

"우리 조종이 천도(天道)를 봉행하여 인(仁)이 만방을 덮으므로, 봉작(封爵)의 은혜가 멀다고 해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내자(內子)를 추봉(推封)하는 의식은 오직 예의지국(禮義之國)에만 특별히 시행하노라. 성헌(成憲)이 구존하니 잊어서는 안 된다. 너 윤씨(尹氏)는 곧 조선국(朝鮮國)의 배신(陪臣) 윤지임(尹之任)의 딸로서 내칙(內則)을 따라 어진 임금의 계배(繼配)가 되었는데, 내정(內政)에 마땅하고 치화(治化)에 도움이 있으리라. 이에 특별히 국왕의 청을 따라 조선 국왕의 계비로 봉하고 고명을 내린다. 아, 순종함으로 임무를 삼았으니 일찍이 어미의 훈계를 들었고, 경계로 서로 도우니 또한 제사가 내조를 힘입으리라. 언제나 공경하고 삼가 다 같이 아름다운 상서를 맞이하리로다."


하였다. 하사한 관복과 물건은, 주관(珠冠) 1정(頂), 대홍저사협대삼(大紅紵絲夾大衫) 1건(件), 청저사채수권금적계협배자(靑紵絲綵繡圈金翟鷄夾褙子) 1건, 청선라채수권금적계하피(靑線羅綵繡圈金翟鷄霞帔) 1건, 녹세화저사철채수적계단삼(綠細花紵絲綴綵繡翟鷄團衫) 1건, 홍암화저사협오아(紅暗花紵絲夾襖兒) 1건, 청암화저사협군(靑暗花紵絲夾裙) 1건, 아홀(牙笏) 1부(部), 금추두(金墜頭) 1개, 잡색저사(雜色紵絲) 4필, 잡색라(雜色羅) 4필, 서양포(西洋布) 10필 등이다.

 

-중종실록 32권, 중종 13년(1518년) 4월 21일 기축 2번째기사

 

이는 중국의 명 조정에서 자국(중국의 명나라)의 조정에 입조해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조선국에게만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오는 것은 물론, 아예 조선국의 또다른 국호(국명)로 예의지국 곧 최선진국 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입니다. 요새로 치면, 현 우리 대한민국을 두고 대한민국이 아닌 최선진국 이렇게 호칭한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이를 보면, 현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 전성기가 아니라, 그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 북한이 우리나라 역사상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최약체고, 그 다음이 현 우리 대한민국이라고나 할까요? 이는 현 중국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만큼, 중국과 한국의 역대 왕조들이 지녀온 국제적 위상, 총체적 역량이 굉장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현 중국과 한국은 근래에 본격적인 약진을 하면서 이를 본격적으로 복구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즉,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이래 기원후 1800년대 전반(기원후 1800년대 중반 시점부터는 근현대사가 시작되는 시점 곧 영국에 의해 시작된 산업혁명이 만개하는 시점이지요.) 시점에 이르는 반만년의 시기 동안 자신들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 오직 조선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고조선~조선)들에게만 전세계의 압도적인 일등국에 해당되는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온 것은 물론, 규모가 자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을 뿐, 종합적인 선진화 수준은 자신들과 동급이며 전세계의 모든 타국들이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칭송해온 것이죠.

 

https://www.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board&no=9224564

 

이를 보시다시피, 전세계 역사상에서 역사(문명) 시대가 시작된 이래 기원후 1800년대 전반에 이르는 반만년의 시기 동안 변함이 없는 전세계의 압도적인 양대 최강대국, 최선진국은 중국, 한국이여왔음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흥미로우니만큼, 유익한 참조가 되어드렸으면 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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