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臣)이 옥하관(玉河館)에 있을 때에 운남(雲南) 향공 진사(鄕貢進士) 최헌(崔瓛)과 서로 통어(通語)하였는데, 하루는 경사(經史)를 담론하다가 최헌이 신에게 이르기를, ‘새 천자(天子)는 심히 엄명(嚴明)하여 온 천하가 모두 심복(心腹)하고 있으며, 또 기순(祁順)·동월(董越) 등의 사신들이 돌아와서 모두 그대의 전하(殿下)는 현명하다고 하고 칭송하여 중국(中國)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대의 전하는 과연 어떠한 임금입니까?’고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성명인서(聖明仁恕)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며, 재예(才藝)에 이르러서도 그 정묘함이 극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시어, 온 나라 사람들이 떠받들기를 부모와 같이 하며, 두려워하기를 신명(神明)과 같이 하니, 참으로 성주(聖主)입니다. 또 우리 나라 옛날의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백제(百濟)·동옥저(東沃沮)·북옥저(北沃沮)·예맥(穢貊) 등지를 모두 하나로 합하여 땅은 수천리(數千里)를 보유하고 갑병(甲兵)이 수십만이며, 나라는 부(富)하고 병정은 강하며,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무릇 진공(進貢)하는 토산물은 모두 친히 감동(監董)하고 선택하며, 하는 날에는 새벽에 교외(郊外)까지 나와 전송하고, 성절(聖節)과 정조(正祖)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배하(拜賀)하십니다.’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습니다. 참으로 현군(賢君)이십니다. 그러나 그대의 말로 성(聖)이라 함은 지나치거니와, 황제는 참으로 성명(聖明)이십니다. 성(聖)자를 번왕(蕃王)에게 붙이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순(舜)임금은 동이(東夷)의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의 사람입니다. 현인(賢人)·성인(聖人)이 나는 바를 어찌 화이(華夷)로 구분하겠습니까? 공자(孔子)도 또한 필부(匹夫)이면서 성인이시거늘, 어찌 우리 전하께서 해외(海外)에 거(居)한다 해서 성인이 되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니, 최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정말 옳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종실록 219권, 성종 19년(1488년) 8월 24일 을묘 3번째기사
이는 조선국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488년경때 조선국 사신단이 중국의 명나라 조정에 입조해있을 때, 당시 조선국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이 현군인 것에 대한 얘기를 중국의 명나라 조정의 관리가 먼저 꺼내었으며, 이에 조선 사신단원이 조선의 강성, 성대함이 당시의 조선 제 9대 임금인 성종이 현군인 덕이라며 요새로 치자면 조선은 '성종 보유국' 인 덕택에 성대함을 이루어낸 국가라며 크게 자랑하기를 마지않았으며, 이를 들은 중국의 명나라 관리 최헌은 큰 반론 없이 수긍을 해주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롭고 또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현 시대에도 대외적으로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는 XXX 대통령 보유국' 이러진 않는데, 조선 시대엔 당당하게 그러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울 따름이지요.
5일 동안 철시(輟市)하였다. 여염(閭閻)의 세민(細民)들도 애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고, 눈물을 흘리며, 왜 내 몸으로 임금의 몸을 대신하여 죽지 못하나 하는 이까지 있었다. 동평관(東平館)에 다다른 왜인(倭人)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대답하였더니, 왜인들이 서로 울며 ‘성군(聖君)이 돌아가신 때에 어찌하여 마침 우리가 왔는가.’ 하고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권, 연산 즉위년(1494년) 12월 28일 계미 8번째기사
인경 등이 대전에게 아뢰기를,
"권도를 따르신다는 말씀을 듣고 조정이 감격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세종(世宗)께서 태종(太宗)의 초상에 권도를 따르셨으며, 세조(世祖)께서 대군으로서 세종의 초상에 역시 권도를 따르셨으며, 정희 왕후(貞熹王后)께서 승하하셨을 때에도 성종(成宗)께서는 겨우 1개월 2일 만에 권도를 따르셨으니, 이는 오늘 시작된 일이 아니고 조종조로부터 그러했습니다. 이미 권도를 따른다 해도 마음으로 미안해 하신다면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세종과 성종께서는 동방의 성인이신데도 그렇게 하셨으니 미안하게 여기지 마소서. 외방에서 봉진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하교대로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인경 등에게 답하기를,
"조종조 때의 사례는 비록 이와 같으나 이번에는 상을 당한 것이 한 번이 아니고 지금 빈전에 계신 달수도 얼마되지 않으므로 매우 미안하다. 자전과 조정의 뜻을 따라 마지못해 이와 같이 하나 미안한 뜻은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하였다.
-명종실록 1권, 명종 즉위년(1545년) 8월 18일 무신 6번째기사
상이 석강에 나아갔다. 검토관(檢討官) 박민헌(朴民獻)이 아뢰었다.
"신이 일찍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았더니, 성종(成宗)이 즉위한 원년(元年)에는 춘추가 아직 어렸는데도 학문에 매우 부지런하였습니다.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이르기를 ‘혹 성체(聖體)가 피로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성종이 대답하기를 ‘마음에 참으로 즐기는데 어찌 피로함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세종(世宗)은 모화관(慕華館)에 행행(行幸)하여 강무(講武)를 하고 나서도 경연(經筵)에 나아가을 백 번까지 읽었습니다. 세종은 만기(萬機)의 여가에 이렇게까지 부지런히 글을 읽었기에, 지금 세종을 일컫는 사람은 반드시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이라고 하는데, 성종도 세종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고어(古語)에 ‘조종을 본받는 것이 곧 성인(聖人)을 본받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세종과 성종은 바로 오늘날 더욱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명종실록 7권, 명종 3년(1548년) 3월 14일 기축 3번째기사
신이 듣건대 세종대왕께서 인재를 배양함에 있어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이라고 일컬었고, 성종께서는 일체 세종의 고사를 따라 간언을 받아들이고 선비를 사랑하신 때문에 당시의 사대부 중에는 죄를 입은 사람이 없었는가 하면, 살리기 좋아하는 덕이 민심(民心)속에 흠씬 젖어 있어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1561년) 4월 19일 무신 1번째기사
https://www.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board&no=9297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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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운운하는 것은 사장되야 할 언사입니다. 현대에 비해 시대적 차이가 있는 것 뿐, 오히려 원복해내야 할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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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서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이런 언사를 자주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https://www.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board&no=9303078
여러분들께서도 위의 기록들을 잘 보시다시피, 조선국 제 13대 임금인 명종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561년경때 한 대신이 고금의 예를 언급하면서, 조선국 제 4대 임금인 세종이 해동의 요순으로 칭송했으며, 조선국 제 9대 임금인 성종은 일체 세종의 예를 따라서 대소신료들의 간언을 받아들이고, 선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성종조 당시의 사대부들 중에서는 어떠한 이유로든 죄를 입은 사람이 없었는가 하면, 매우 성군인지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성종을 변함없이 칭송하고 있다는 언급입니다. 조선 시대 당시 제 4대 성군으로는 세종, 성종, 영조, 정조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조선 전기 곧 제 1차 전성기는 세종, 성종이 이뤄내었고, 조선 후기 곧 중흥기, 부흥기, 제 2차 전성기는 제 21대 임금인 영조, 제 22대 임금인 정조가 이뤄낸 것으로 봐야지요.). 여기에서 성종이 제일로 여겨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성군의 상징으로 세종과 맞먹으면서도 구체적으로는 세종보다도 더 성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지요. 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군하면 세종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정작 조선 시대 당시에는 오히려 성종이 세종과 맞먹거나 내지 세종을 초월하는 성군의 상징으로 여겨온 듯 합니다. 성종을 임금으로써의 이상향 이렇게 간주한 듯 해보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성종이 붕어(사망)하였을 때에도, 국내외를 불문하고 애도하는 수준이 남달랐다는 기록도 대단히 주목될 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기록들을 통틀어서 보면, 국내외 기준으로도 조선의 제 9대 임금인 성종을 두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칭송을 많이 했다고 파악해도 무방하다고 보여집니다.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이 될 사람들도 세종보다는 성종을 국가원수로써 추구해야 할 최종 지향점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고 생각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아가, 조선의 제 5대 임금인 문종의 단명, 제 6대 임금인 단종의 폐위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바로 반정인 계유정난으로 집권하긴 하였지만, 명군에 해당될 정도의 치세를 보여온 제 7대 임금인 세조(진양대군, 수양대군)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의 제 1차 최전성기를 이룩해낸 제 9대 임금인 성종의 치세 때문이죠. 설사 문종이 장수하고 단종이 폐위당하지 않은 채 보위를 정상적으로 유지해나갔다고 해도 세조, 예종, 성종 치세보다 나았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고 보여지기도 하니까요. 동시기 중국의 명나라도 제 3대 임금인 성조(태종, 영락제)가 정난의 변이라는 반정을 통해 집권했지만, 이를 시작으로 하여서 제 4대 임금인 인종(홍희제), 제 5대 임금인 선종(선덕제), 제 9대 임금인 효종(홍치제)이라는 성군, 명군들이 명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것과 유사하다고 파악할 수 있으니 말이지요. 유익한 참조가 되어드렸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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