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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서울의 어떤 겨울

난데없이 선포된 비상계엄
국회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우린 어떤 아침 맞이했을까
참담함 속 의지 더 선명해져


다행이다.
190명의 국회의원과 시민들이 헌법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켜내서 다행이다.
어이없이 선포된 비상계엄을 155분 만에 해제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 결정이 내려진 후에도 대통령의 해제 선언이 발표될 때까지 다시 세 시간을 기다리느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만일 계엄군이 좀 더 일찍 국회 본관을 봉쇄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했더라면, 우리는 전혀 다른 아침을 맞이해야 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강의를 하러 가는 출근길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전날 도심에 등장했던 장갑차와 총을 든 군인과 바리케이드가 보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던 평화가 송두리째 깨져버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우리가 읽고 쓰는 자유가 무참히 군홧발에 짓밟힐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의실에 들어서서 학생들과 “밤새 안녕”이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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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학생들도 거의 잠을 못 자고 온 모양이다.
“계엄령은 ‘서울의 봄’ 같은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일을 보면서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장 이번 주에 공연할 동아리 연극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앞이 막막했어요.” “엄마는 별일 없을 거라고 얘기했지만, 윤석열을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한밤중에도 국회로 달려가 현장을 지키고 계엄군의 모습을 찍어서 알리는 시민들이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빠른 시간 안에 진화가 되긴 했지만, 계엄이나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십 대의 학생들에게 그 충격과 두려움은 매우 큰 것 같았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중학교 시절의 교실을 떠올렸다.
우리는 종일 교실에 울려 퍼지는 장송곡을 들으며 국부의 죽음에 애도를 표해야 했다.
어떤 아이는 아버지를 잃은 듯 진심으로 슬프게 울어댔다.
나는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우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 울음이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강탈하고 계엄령을 몇 번이나 연장하면서 장기 집권한 독재자의 국가주의적 산물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흰 칼라를 떼어내라 했다 / 우리는 서로의 교복에 칼을 대어 / 실밥을 뜯어내고 있었는데 / 그것은 죽음의 새가 되기 위한 / 분장 같은 것이었다 / 날개의 싱싱함을 꺾고 / 교실에 웅크리고 앉아 / 흘러나오는 장송곡에 귀를 기울이라 했다”로 시작하는 ‘어느 날 아침’이라는 시를 쓴 것은 시인이 된 후였다.

그 직후인 1979년 12월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다시 군사 반란을 일으키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작년에 개봉해 1300만명 이상이 본 영화 ‘서울의 봄’은 바로 그 시기를 다루고 있다.
그로부터 45년이 흐른 2024년의 대한민국에서 그들은 도대체 계엄령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여겼을까. 전 국민이 카메라를 장착하고 유튜버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어떻게 언로를 막고 무력으로 모든 걸 밀어붙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주동자들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난다.
이제 그들은 내란죄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근무하고 있는 대학에서 시국선언문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사태를 겪었다.
서명에 참여한 교수들과 교직원들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만일 계엄령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어기고 체제를 전복하려는 세력으로 몰려 체포되거나 징계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적인 계엄령에 불복하기 위해서라도, 덜 부끄러운 선생이 되기 위해서라도, 시국선언문을 발표해야 할 명분과 필요성은 오히려 커졌다.
비상계엄이 하룻밤의 해프닝으로 끝나서 다행이긴 하지만, 시국선언문에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까지를 담으려면 내용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참담함이 더 깊어진 만큼 우리의 의지는 더 선명해졌다.
오늘은 퇴근길에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석했는데, 피켓을 든 청년들의 모습이 많이 보여서 반가웠다.
이렇게 우리는 서울의 어떤 겨울을 통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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