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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앙겔라 메르켈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먼저 결정하고,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라” [김용출의 한권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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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트럼프와의 대화에서 내린 결론은 분명했다.
전 세계 공통의 문제를 그와는 함께 해결해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에 뛰어들기 전 부동산 사업을 했는데, 이후에는 모든 것을 부동산 사업가의 눈으로 판단했다.
모든 부동산은 단 한 사람에게만 양도될 수 있다.
누군가 그걸 얻지 못하면 남이 그걸 얻는다.
그는 세계도 이런 식으로 보았다.
그는 협력을 통해 모두의 번영이 증진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616쪽)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7년 3월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 뒤 돌아가는 귀국 비행기에서 이 같이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트럼프는 부동산 사업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제로섬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4년 뒤인 2021년 12월 2일 목요일 오후 7시30분, 메르켈은 연방 의장대 소속의 여군에 안내를 받아서 국방장관, 합참의장과 함께 국방부 청사로 갔다.
거기에는 초대받은 손님 200여명이 마스크를 쓰고 지정석에 앉아 있었다.
조촐하게 열린 그의 퇴임식에선 자신이 신청한 노래 <나를 위해 붉은 장미 비가 내릴 거야>도 연주됐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기적을 만나 옛것에서 벗어나 새롭게 펼쳐나갈 거야....

총리 퇴임식이 끝나자 그는 총리청으로 가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했다.
메뉴는 소시지, 고기 완자, 감자 샐러드. 16년 전 총리청에 처음 들어와서 먹은 음식과 똑 같았다.
시작한 곳에서 모든 것이 다시 끝났다.
엿새 뒤, 그는 총리청을 떠나 전임 총리 사무실로 들어섰다.

동독에서 자란 메르켈 총리는 2005년 11월 독일의 첫 여성 총리가 돼 16년 동안 재임하면서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 10년 연속 선정될 정도로 유럽을 넘어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 지도자였다.
재임 기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 유로존 위기, 유럽 난민 사태, 팬데믹 등 국면에서 독일 정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독재 정권인 동독에서 생활하고 대학에 다니고 일하는 것은 어떠했고, 나라의 붕괴와 함께 자유를 얻었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동독 출신 여성이 어떻게 16년 동안이나 통일 독일의 총리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 특별한 스캔들이나 총선에서 패하지 않았음에도 왜 스스로 총리직에서 물러났을까.

‘무티(엄마) 메르켈’로 불리며 퇴임 이후에도 독일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오랜 보좌관이자 정치 고문인 베아테 바우만과 함께 자신의 자서전 『자유: 1954-2021년을 회상하다』(박종대 옮김, 한길사)을 펴냈다.
2021년 12월 퇴임한 뒤 약 3년 만으로, 700쪽에 달하는 자서전은 독일과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전 세계 32개국에서 동시 출간됐다.

메르켈은 책에서 동독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청소년기, 대학 시절과 학업, 정치 인생의 시작과 하원의원 생활, 기민당 대표와 총리 당선 등의 인생 역정을 차분히 풀어간다.
이와 함께 세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과 만나 나눈 대화와 국제 사회의 전환점을 되돌아보는 한편, 지금 세상을 만든 결정들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진실을 들려준다.
탈원전,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난민 수용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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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르면,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목사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와 어머니 헤를란트 카스너 사이에서 태어난 메르켈은 생후 6주 만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 크비초로 이주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후 1989년 통일될 때까지 동독에서만 살았다.

“나는 꽤 촌스런 아이였다.
크비초에서 지낼 때는 목이 마르면 아무렇지도 않게 닭의 물그릇에 담긴 물을 마셨고, 발트호프에서는 밭에서 뽑은 당근을 그냥 옷에 쓱쓱 문질러 먹기도 했다.
”(54쪽)

메르켈이 공산주의 체제에 희망을 버린 것은 공산주의 소년단 멤버로 소련을 다녀온 뒤였다.
소련의 현실은 선전하는 내용과 달랐다.
그의 가족은 오히려 반체제적 인쇄물을 비밀리에 배포한 혐의로 국가안전부의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동독 시절부터 그에게 자유에의 갈망은 숙명 같은 것이었다.
그가 대학 진학 당시 물리학을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내가 물리학을 선택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물리학은 자연과학이었다.
동독 정권도 자연과학적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었다.
”(82쪽)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대학을 다녔고, 재학 도중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했으며, 졸업 후에는 베를린 과학아카데미에서 일하게 됐다.
1981년 울리히와 헤어진 그녀는 아카데미 동료 요아힘 자우어와 동거해 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그의 인생이 바뀐다.
독일 통일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는 베를린 과학아카데미를 떠나서 시민단체 ‘민주주의 각성’에 가입해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단체의 대변인으로 활약한 메르겔은 동독 정부의 마지막 부대변인이 되고, 1990년 독일 통일 직후 ‘민주주의 각성’이 기독교민주당(기민당)과 합당하면서 기민당의 연방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1991년 첫 ‘통일 독일 총리’로 불린 헬무트 콜 총리에 의해 여성청소년부 장관에 발탁됐고 1994년에는 환경부 장관을 역임했다.
환경부 장관 재직 당시 핵폐기물 이송 갈등을 겪으면서 평화로운 핵 이용을 찬성하면서도 핵 역시 사회적 합의가 없으면 막대한 비용을 초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를 발탁한 콜에 대한 평가다.

“콜은 역사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렸다.
‘역사는 역사다.
’ 그의 전설적인 명언 가운데 하나다.
이는 항상 역사적 맥락에서 작금의 문제를 관찰하고 결정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그는 항상 사람의 성격을 가늠한 뒤 이를 바탕으로 신의를 구축하고자 했다.
”(286쪽)

하지만 1999년 물러난 홀무트 콜 전 총리의 불법 기부금 수령을 비판한 뒤 기민당 당대표에 취임했다.
그가 한 당대표 출마 연설은 유명하다.

“나는 세계화된 환경에서 사회적 시장경제의 윤리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기민당을 원합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조건 하에서도 시장과 인간성을 조화시킬 줄 아는 기민당을 원합니다.
”(295쪽)

2005년 5월 조기 총선에서 기사당과의 연합을 통해서 사민당 정권을 무너뜨린 뒤, 기사당에 사민당까지 포괄하는 대연정을 통해서 독일 최초의 여성·동독 출신 총리가 됐다.

총리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국내총생산(GDP)의 3.3% 수준이었던 재정 적자 상태를 물려받은 그는 공무원 임금 삭감과 연금 개시 시점 상향 조정 등 강력한 개혁을 통해 난관을 돌파했다.
글로벌 경제 위기 때에는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에 강력한 자구책 마련이라는 조건을 붙였고, 2015년 9월 유럽으로 들어오는 난민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리는 등 외교 분야에서도 리더십을 선보였다.

하지만 2017년 3월 미국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악수 패싱’ 논란을 비롯해 트럼프 대통령과의 갈등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트럼프 당선인이 블라디미르 푸틴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다며 전제적이고 독재적인 특성을 보인 정치인이 그를 사로잡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푸틴에게 푹 빠진 듯했다.
이후 몇 해 동안 나는 트럼프가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성향의 정치인들에게 매료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 이야기는 이어진다.
“트럼프가 내 논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대개 뭔가 새로운 비난거리를 찾기 위한 목적밖에 없었다.
내가 제기한 문제의 해결은 그의 목표가 아닌 듯했다.
”(614쪽)

이때 그가 세계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협력적 번영을 모색하자며 트럼프에게 예로 든 것은 바로 한국의 FTA였다.

“나는 유럽연합과 한국의 자유무역협정을 예로 들며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상호 이익을 이야기했지만, 그는 꿈쩍도 안했다.
”(616쪽)

그는 트럼프가 함부르크 G20 정상회의 6주 전에 전화를 걸어서 파리기후협정 탈퇴를 선언하는 등 파리기후협정에서도 갈등의 불을 붙였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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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시작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내막도 책에 담았다.
2008년 나토정상회의 당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려 했지만 가입 유예기간 동안 닥칠 위험을 이유로 가입 절차 진행을 반대한 그는 2014년 크림반도 분쟁 당시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러시아와 대화를 중재했지만,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해 대화 노력이 중단됐다.

메르켈는 책에서 자신의 정치적 철학 또는 태도에 대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들을 결정한 뒤,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먼저 현실적으로 가능한 시나리오와 방법을 도출한 뒤, 이 가운데 가장 올바른 것을 선택해 추진한다는 이야기다.
그의 이같은 현실주의는 ‘유럽의 병자’로 불린 독일을 ‘유럽의 엔진’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총 5부로 구성된 책은 1∼2부에서 동독에서의 삶을, 3부에선 독일 통합의 과정을, 4∼5부에선 총리로서 독일을 이끈 경험을 담았다.

‘정치 사안은 거의 항상 권력 문제’ ‘이슈를 선점하는 사람이 성공을 거둔다’ ‘전쟁은 언제나 정치와 외교의 실패’ 등 성공한 정치인으로 그가 오랜 시간 경험하고 터득한 여러 정치적 교훈이나 격언도 인상적이다.
그의 몇 가지 정치적 루틴도 엿볼 수 있다.

총리청 아침회의는 현안을 논의하고 정부 대변인의 기자회견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아침 30분 정도 최측근들과 회동을 가졌는데, 화, 목, 금요일은 대개 오전 8시30분에, 내각회의가 있는 수요일에는 오전 7시45분에 각각 열렸다.
내각회의 경우 매주 수요일 오전 9시 30분에 총리실에서 개최했고, 각 연정 파트너들은 이에 앞서 오전 8시15분 각각 따로 조찬모임을 가졌고, 오전 9시15분에 총리실에서 부총리와 사전 면담이 이뤄졌다.
심지어 그의 메이크업 루틴도.

“아침마다 페트라 켈러가 화장을 해주고 헤어스타일을 만져준다.
가끔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주기도 한다.
연방총리는 대내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70쪽)

책에는 각종 사건과 행위, 자신의 일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하고, 자신의 주요 정책 결정에 대해선 당시 자신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그의 모습이 엿보인다.
특히 트럼프나 푸틴 대통령 등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국가 지도자 사이의 내밀한 대화와 의사결정 과정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에게 자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자신의 회고록에 ‘자유’라는 제목을 붙여야만 했을까.

“개인적으로 정치적으로든, 내가 평생 천착한 문제다.
나에게 자유란 나의 한계가 어디인지 알아내고, 그 한계까지 나아감을 의미한다.
또한 정계 은퇴 뒤에도 배움을 중단하지 않고 멈춤 없이 계속 나아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나에게 자유란 내 인생의 새 장을 연다는 뜻이다.
”(737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한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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