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모르는 사람한테서 작은 친절을 받아본 적 있는가. 미국에서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할 때다.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 곳곳에서 적잖은 통행료를 내야 했다. 어디선가 통행료를 내려고 했더니 “그냥 가라”고 했다. 일면식도 없던 앞선 차량 운전자가 미리 내준 것이다. 한 번은 아내와 버지니아주 매클레인의 한 커피숍에 갔다. 두 잔을 주문했더니 한 잔 값만 받았다. 이곳을 다녀간 어느 손님이 자신이 선택한 것과 같은 음료를 주문한 누군가를 위해 계산을 미리 해뒀다고 했다. 그때 ‘우연한 친절’, ‘뜻밖의 친절’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실감했다.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끝을 알 수조차 없는 우주 공간에서 지구라는 별에, 남북으로 갈린 국가의 남쪽에, 부모님 자녀로 태어난 자체가 엄청난 확률의 우연인 듯, 필연인 듯하다. 우연은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그렇다고 통행료를, 음료값을 내준 누군가가 세상을, 역사를 바꾸려 했던 건 아닐 터이다. 그저 누군가의 작은 기쁨을 상상했으리라. 그러면서 스스로 미소 짓지 않았을까. 10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 한 빵집에 누군가 500만원 거액을 현금으로 선결제한 사연이 화제다. 여의도에서는 12·3 계엄 사태 이후 줄곧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50대 남성은 집회 참석자들에게 커피를 무료로 제공해 달라고 했다. 14일부터 1200명 정도가 무료 음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윤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2차 탄핵 표결이 예고된 날이다. 결제 코드가 ‘김민주’인 걸 보면 그의 뜻을 짐작할 만하다. 민주주의를 향한 선한 영향력을 기대했으리라. 국회 1차 탄핵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 의원 105명을 향한 위협이 심각한 양상이다. 의원들 사진과 전화번호를 공개하거나 근조화환을 보내는 것을 넘어 의원 지역사무실 문에 스프레이로 낙서하고 집 앞 현관에 흉기를 놓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새벽에 정당 현수막에 방화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민주주의 이름으로 벌이는 반민주적 테러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선한 영향력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지만 악한 영향력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박희준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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