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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사상이나 이념을 표현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무수한 작품들이 있었고,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기에 새로운 작품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하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상이나 이념을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폴 고갱은 그런 시도를 했다.
그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인간 내면의 세계에까지 눈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이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이념이나 사상 등을 암시하고 상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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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아름다운 안젤라’(1889년)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은 혼란스러웠다.
산업 생산을 통한 물품들이 넘쳐나고, 물질 만능적인 세태가 사회 곳곳에 반영되어 있었다.
반면 종교나 도덕같이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고갱은 미술 작품으로 물질 위주의 향락적 풍토를 정화하려 했다.

어떤 방법이었을까. 고갱은 굵은 윤곽선과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는 단순한 큰 색 면을 사용했다.
설명적인 그림의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와는 반대로 색과 형태의 종합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보는 그림이 아닌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하는 그림을 그리려 했다.

‘아름다운 안젤라’는 그렇게 그린 그림이다.
십자가 목걸이를 건 소녀가 원 안에 있고, 밖에는 페루의 원시 종교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보인다.
어머니가 페루계고, 3살부터 7살까지 페루에서 살았던 고갱은 페루의 원시 종교 도상을 정신적 가치의 상징물로 나타냈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인 소녀와 원시 종교 조각상을 원으로 분리시켜 서로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종교적 신비감을 주는 파란색과 생명을 상징하는 대지의 황갈색이 원의 안팎을 연결하고 조화를 이루게 했다.
이로써 서로 근원이 다른 종교지만,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고 숭배한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당시엔 잘못 그린 작품이라고 혹평을 받았지만, 고갱의 이런 그림 덕분에 지금 우리는 그림에서 정신적 가치를 찾고 위안을 받는다.
지금처럼 어수선할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박일호 이화여대 명예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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