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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의시읽는마음] 어느 날 나는 악기 상가 앞에 서 있다

장석남

낙원동 악기 상가를 지날 때
나의 걸음은 느리고
세상 모든 파출소 앞을 지날 때
나의 걸음은 빠르고
백만송이 꽃집 앞을 지날 때
나의 걸음은 유장(悠長)하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몸은 지나쳤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악기 상가 앞에 서 있다
어느 날 나는 악기 상가 앞 봄비 속에 서 있다
어느 늦은 밤 불 꺼진 악기점 앞에 서 있다
어느 눈 날리는 오후 악기점 앞에 서 있다
어느 단출한 선율이 나를 데리러 올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악기 상가 앞에 서 있다
newhub_20250217517222.jpg
누구나 마음속에 품은 노래 하나쯤 있겠다.
사는 일에 치여 반쯤 잊어버렸다 해도 여전히 내 것인 노래. 청춘일 수도 사랑일 수도, 어쩌면 열락처럼 펄펄한 상처일 수도 있는 노래. 그러므로 불 꺼진 악기점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자연스레 나의 그림자와 겹쳐진다.
비가 부슬거리는 봄날에도, 눈이 흩날리는 겨울날에도 악기 상가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 몸은 지나쳤어도 마음만은 거기 그대로 두는 일. 오래 기다리던 선율이 불현듯 데리러 올 때까지.

낙원동…. 한때 나는 낙원동의 한 오래된 건물 꼭대기에 자리한 극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 이십 대의 여러 인상적인 영화가 그곳에서 펼쳐졌다.
극장은 벌써 한참 전에 사라졌지만, 나는 지금도 이따금 극장이 있던 자리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떠올린다.
그 꼭대기 극장에 닿기 위해서는 층층의 악기점을 숙명처럼 거쳐야 했다는 것을.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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