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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프리즘] 뇌는 상실의 슬픔을 어떻게 극복할까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 죽음
부정적 감정에 압도 무기력화
죄책감에 매몰 땐 못 헤어 나와
일상 살아갈 새 힘을 찾아내야


지난 몇 주 동안 이어진 슬픈 소식들의 연속은 때때로 일상을 제대로 이어가기 어렵다고 느낄 정도로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참사로 가족과 친구들을 잃은 지인들의 이야기에 함께 눈물 흘리다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한 초등학교 아이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망연자실해 있던 도중에, 며칠 있다가 만나기로 했던 가까운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까지 듣게 되니 뇌에 안개가 낀 것처럼 그저 멍한 상태로 한 주를 보냈다.

뇌는 상실의 슬픔을 어떻게 경험할까? 가까운 이를 잃는 경험은 뇌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단기적으로 상실의 소식을 접했을 때 뇌는 우리 스스로가 자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게 반응한다.
뇌는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매우 큰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는데 편도체는 과활성화 상태에 들어가 두려움과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압도하게 되고, 동시에 위협 신호에 반응하는 다른 뇌 영역들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시상하부에서 뇌하수체를 거쳐 부신피질에까지 신호가 차례로 전달되며 다량의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된다.
하지만 전전두엽과 대상피질의 활동은 억제되는데 이는 일시적으로 생각하기가 어려워지고 판단력이 흐려지는 멍한 ‘브레인 포그’ 상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장기적으로는 뇌 안에 형성되어 있는 많은 회로가 긴급하게 재구성되고 그 과정에서 정상 상태처럼 작동하지 않는 뇌의 여러 영역이 생겨나 트라우마로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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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선 궁금한뇌연구소 대표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을 보거나 만날 때, 뇌 안에서는 보상 회로가 작동한다.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졌던 이유는 뇌의 측좌핵에서 이 자극에 반응해 도파민을 분비하고 뇌는 이를 매우 긍정적인 보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던 이가 죽으면, 뇌는 이 사실을 처음에는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그 사람과 관련된 신호들을 계속 찾는다.
마치 중독 클리닉에 갇혀 있는 환자들이 자신의 중독 대상을 갈구하듯이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나에게 크나큰 기쁨을 주던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남은 사진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게 되면 이 자극은 보상회로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편도체를 과활성화시키면서 슬픔과 분노,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이 압도하게 된다.
죽은 사람을 계속 보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죽은 사람과 관련된 소식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아프면서 슬프고 화가 나게 되는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생각과 판단을 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돌아오면서 멍한 상태에서 깨어나기는 하는데 반대로 특정 생각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만약 내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을 끝없이 돌리면서 그 생각을 멈추기 힘든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에서 감정과 생각의 과활성화 상태를 경험하는 시간이 계속 흐르게 되면 어느 순간 뇌는 그 어떤 감정도, 생각도 활성화할 힘이 남지 않게 되면서 극심한 우울과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상실의 아픔과 슬픔에서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뇌가 끊어진 연결을 극복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야 하고, 감정들을 정상적인 상태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식음을 전폐하고 고립된 상황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슬픔은 온전히 간직하되 부정적인 감정에만 압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내가 웃어도 되나? 일상생활을 그냥 유지하는 것이 잘못된 것 아닌가? 상실의 아픔을 경험한 직후에는 이러한 생각들을 당연히 하게 되지만, 이러한 종류의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
애도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방법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다.
독일어에서 ‘노래’를 뜻하는 Lied의 어원은 ‘비통함’을 뜻하는 Leid와 같다.
영어에서 ‘춤’을 의미하는 Dance나 독일어 Tanz의 어원은 12세기 프랑켄 지방의 말 ‘Dintje’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떨다, 떨리다’를 의미한다.
노래나 춤은 모두 슬프고, 비통하고, 떨리는 마음을 극복하는 데서 시작했고, 어찌 보면 가장 슬프고 비통한 순간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순간, 뇌는 타인과 연결감을 느끼며 새로운 회복의 연결 회로를 만들 수 있고, 잠시라도 일상 속에서 웃고 떠들 수 있을 때 우리는 슬픔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다.

침묵과 근엄함만이 애도의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모두에게 이러한 방식을 강요한다면 우리의 뇌는 회복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노래하는 이는 노래할 수 있어야 하고, 춤추는 이는 춤출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은 슬프더라도 우리는 때때로 웃을 수 있어야 하고, 일상을 묵묵히 살아간다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위대한 일이다.
우리가 아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떠난 이를 위해서라도 더 나은 삶을 꼭 살아갈 수 있기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장동선 궁금한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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