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밖으로 내몰린 청소년들
의지할 한 사람만 있더라도
떠나지 않을 용기 낼 수 있어
이번 삼일절에 독립영화관에 갔다.
유별나게 독립영화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가서 보게 된 영화는 ‘정돌이’였다.
좌석이 맨 앞줄만 남아있었다.
나는 고개 쳐들고 줄줄 눈물 흘렸다.
별 기대감 없이 본 다큐멘터리인데, 이 시대에 이웃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삶을 꿈꾸며 산다는 게 뭘까 고민하게 했다.
내가 만일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시 구절이 생각났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도 자릴 뜨지 못했는데, 무대로 오동진 영화평론가가 등장했다.
이어서 김대현 감독과 송귀철 배우가 나와 의자에 앉았다.
이례적으로 ‘관객과의 대화’가 마련되었다.
“주인공인 송귀철 선생님께 질문드릴게요. 중학교 1학년 때 집을 나와 무작정 상경하신 거예요?” 뒤돌아보니 젊은 관객이 질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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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 |
“그렇죠. 고향 마을에서 여러 날 공병들 주워 판 돈으로 서울행 기차는 탔지만, 막상 청량리역에 내리니 날은 저물었고 갈 데가 없었어요. 너무 무서웠죠. 눈 깜짝할 새 코 베간다는 서울이라 너무 불안했어요. 저는 인상 좋은 그 대학생 형(서정만)에게 접근하여 말을 붙였죠. 만약 그날 그 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저는 섬으로 팔려갔거나 형제복지원에 감금되었을 겁니다.
”
정돌이(송귀철)가 어렸을 때, 나날이 알코올중독 증세가 심해지던 아버지는 허구한 날 정돌이를 때렸다.
그의 엄마는 집을 나가버린 상황이었다.
1987년에 가출했던 소년 정돌이는 이제 쉰 살 넘은 중년으로 성장했다.
결혼하여 세 명의 아이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물놀이계의 유명인이 되었다.
장구 치는 사람 사이에서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특출한 연주자라고 한다.
그의 사랑스럽고 드라마틱한 삶은 영화 ‘정돌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관을 나오며 나는 아미나 르지그를 떠올렸다.
2015년에 만났던 사람. 당시 나는 한국 시인 세 분과 파리 문학 비엔날레에 참석했다가 혼자 현지에 남아있었는데, 프랑스 작가의 집에서 우연히 아미나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알제리 시골집에서 17세에 가출하여 파리로 도망쳐왔다.
히잡을 써야 하는 종교적 굴레도 싫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고 어린 나이에 결혼을 강요받아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프랑스어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돈 한 푼 없었던 자신이 파리 노숙자로 지내다가 극단의 허드렛일을 하게 된 경위, 나아가 베르사유의 몽탕시에 극장 무대미술 연출가로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 관해서도 담담하고 나직하게 들려주었다.
우리가 마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던 낮에서 10년이 흘렀으니까 이젠 그녀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겠지. 아미나가 음침한 파리 길거리에서 동전을 구걸하던 소녀였을 때, 연극판에서 알려진 다정한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는 인터뷰집 ‘모든 국적의 친구’를 쓴 이후로 그녀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지구상 어디나 가출청소년들이 있다.
이들은 저마다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을 것이다.
좋은 인연을 만나 새롭고 희망적인 인생을 개척해간 정돌이나 아미나 같은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범죄에 연루되기 쉽다.
폭력적이거나 무관심한 부모에게서 아이들은 분노, 고통, 좌절감, 반항심 등을 일찌감치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집안에서 나는 애물단지구나. 모두 내가 없어지길 바라는 게 틀림없어!’ 나는 통곡을 멈추고 가방을 꾸려 떠났다.
여중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천변을 배회하다 밤이 되자 너무 춥고 배고파 집으로 갔다.
“계집애가 야밤에 어딜 나다녀!” 혼났다.
날이 좀 풀리면 진짜 가출해서 친엄마를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마 이맘때였던 것 같다.
질퍽거리는 운동장 모서리에 목련이 몽우리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2학년이 되었고 새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젊은 여자, 국어 선생님이셨고 명랑하셨다.
“너는 작가가 될 것 같구나. 멋진 시인이 되겠어!” 선생님의 한 마디에 나는 집이든 세상이든 떠나지 않을 용기를 냈다.
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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