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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고 상처받은 존재들의 이야기가 들리는가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1025개 얼굴과 이야기
한국 여성주의 미술 代母 윤석남 작품
유기견 1025마리 보살피는 할머니 사연
경외심과 연민을 담아 6년 넘게 작업
생물학적 ‘여성’ 아닌 ‘모성’으로 마주해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과의 공존 모색
23일 세계 강아지의 날 의미 새겨보길


서로 다른 표정과 몸짓의 1025마리 강아지가 군상을 이룬다.
하나하나 얼굴을 들여다보면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관객을 반기기도 하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강아지를 다 불러 모은 듯한 작품. 그리움과 원망, 환희와 슬픔 등 모든 존재가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의 집결체. 윤석남의 ‘1025: 사람과 사람 없이’다.

◆여성들의 역사, 윤석남의 초상

윤석남(86)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린다.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그는 동족상잔의 전란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으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었다.
남성들이 생계를 위해 집을 비우거나 독립운동, 강제노역, 징병으로 떠난 상황에서, 한국의 어머니들은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켜야 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각종 물건을 내다 팔러 거리로 나온 여인들, 홀로 육남매를 양육했던 작가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한국의 모든 여성이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이 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저평가된 조선시대 여성 위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등, 작가는 시대의 무게를 감내하며 강인하게 삶을 이어온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화폭에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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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예술의 새로운 시작 ? 신호탄’?(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건립예정지, 2009) 전시 전경. 윤석남 제공
‘1025: 사람과 사람 없이’도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 여성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신문을 통해 우연히 유기견 1025마리를 아무 조건 없이 보살피는 이애신 할머니의 사연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운영하는 ‘애신의 집’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작가는, 작가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헌신하는 이애신 할머니에 대한 경외심과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연민을 작품에 담기로 했다.
1025마리 강아지가 지닌 고유한 표정과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1년 반 동안 온전히 드로잉에 몰두했으며, 이후 5년에 걸쳐 버려진 나무 패널을 깎고 채색하며 1025마리의 강아지를 탄생시켰다.

◆윤석남의 ‘여성주의’ 예술에 대하여

윤석남의 작품은 비록 ‘여성’의 서사에서 비롯되지만, 남성과 대비되는 생물학적 ‘여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작품의 근간이 되는 ‘모성’에 대해 단순히 자식을 위하는 엄마의 마음이 아닌, “자연을 살리고, 전 지구와 함께 나아가는 삶을 택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여성적 감수성”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작가는 이처럼 남성과 여성, 정치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 것을 제안하고, 인간중심적 사고를 비판하며 여성주의의 개념을 확장해 왔다.
따라서 윤석남의 여성주의는 부드럽고 여리지만 동시에 무엇보다 강한 모성에서 비롯된, 모든 것을 품고 아우르는 사랑과 평화의 예술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세상에 숨을 불어넣어 주는 대자연(Mother Nature), 또는 어둠을 몰아내는 강렬한 태양에 비유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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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사람과 사람 없이’. ‘함(咸): Sentient Beings’(학고재, 2024) 전시 전경. 학고재 제공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 버려지고 상처받은 존재들에 대한 자비와 연민이 담겨 있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던 존재들은 마침내 목소리를 얻고 담담히 스스로를 드러낸다.
켜켜이 쌓여온 시간 속에서 건져낸 이야기들과 꾹꾹 눌러 담아온 감정들은 작품 속에서 피어오르며, 보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윤석남은 이들을 단순히 피해자로 묘사하거나 그들의 아픔을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지닌 근원적 힘과 생명력을 강조한다.
진정으로 이들이 회복하기를 바라는 따뜻한 시선이 작품에 깃들어 있다.

◆인간과 동물, 반려인과 비반려인?공존을 위한 시선

3월23일 세계 강아지의 날에 앞서, 윤석남의 작업에 담겨 있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반려 인구의 증가와 함께, 여러 매체에서 이를 반영하는 듯 다양한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반려동물 관련 산업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동물이 계속해서 유기되거나 학대받고, 인간을 위한 실험에 동원되는 이야기도 끊임없이 들려온다.
반려인과 비반려인 간의 갈등도 증폭되고 있다.

이 같은 사회적 문제들의 근본 원인에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나누고, 나와 다른 존재를 배척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자리한다.
동물애호가들은 그들과 다른 이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반대로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동물애호가들의 태도를 불편하게 여긴다.
동물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단지 우리 인간들에게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와 각자 이해받지 못한 입장만 있을 뿐이다.

◆가장 지고한 형태의 사랑으로

하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는 태양과도 같은 ‘사랑’ 안에서 갈등은 눈 녹듯 사라진다.
체코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는 가장 지고한 형태의 사랑은 “다른 사람의 고독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타인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 상대가 온전히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지켜주는 ‘돌봄’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랑에는 조건도 없고 어떠한 경계도 없다.
따라서 대립이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은 태양처럼 끊임없이 빛과 온기를 나누는 것이다.
태양은 상대가 그 빛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따지지 않고, 모든 생명을 향해 한결같이 빛을 비춘다.
태양의 마음을 품어보면, 그토록 나를 불편하게 했던 존재도, 이해할 수 없던 이야기들도 자연스레 사라진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품은 애정을 대립하는 존재에게 적용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건 하나하나를 피상적으로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윤석남이 작업을 통해 전하는 그 사랑 말이다.
삶 속에서 마주하는 존재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서로에게 조금 더 애틋한 마음을 품어보는 것. 우리가 들어보려 하지 않아 몰랐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 길거리를 떠도는 이름 없는 동물을 비롯하여,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에 조금 더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신리사·전시기획자, 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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