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생성형 인공지능(AI) 다음은 피지컬(물리적) AI"라고 발언하면서 AI 기업 수주를 늘리기 위한 삼성·SK·마이크론 등 '메모리 빅3'의 고대역폭메모리(HBM) 고도화 경쟁이 올 연말 본격화될 전망이다. 빅3는 올 연말에서 내년 초까지 현행 5세대(HBM3E)에서 6세대(HBM4) 양산 체제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 연말, 미국 마이크론은 내년에 HBM4를 양산한다. HBM은 D램 제품 중 하나다. 빅3는 HBM은 물론 D램 전체로도 10㎚(나노미터·1㎚=10억분의 1m) 6세대 D램(1c D램) 양산체계를 갖추기 위해 경쟁 중이다. 1c D램은 지난해 8월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개발을 선언한 기술이다. 지난해 말부터 SK는 물론 삼성과 마이크론 모두 양산 체계를 갖추고 추격을 시작했다.
업계에서는 올 연말에서 내년 초 본격화될 HBM4 주도권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성이 선언한 1c D램 HBM4 양산 체계 성공 여부를 꼽는다. SK, 마이크론보다는 삼성 메모리사업부가 더 큰 변수를 만들고 시장을 흔들 것으로 본다.
삼성전자는 1c D램 양산 체계를 확보하기 위해 생산 라인을 가다듬고 인력 재배치를 하는 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 DS(반도체) 부문은 HBM4 코어다이(베이스다이 위에 쌓는 D램)로 활용하기 위해 지난해 4분기부터 경기 평택캠퍼스 4공장(P4)에서 관련 설비 주문을 하며 생산 라인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 DS부문장으로 부임한 전영현 부회장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부 인력을 메모리사업부로 재배치하는 결단을 내린 이후 1c D램 양산 속도를 높여 HBM은 물론 D램 시장 전체 주도권을 탈환하기 위해 역량을 쏟고 있다.
SK하이닉스가 현재 세계 최고 HBM 기업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12단 HBM3E(5세대)를 엔비디아에 가장 많이 납품하기 때문이다. 12단 HBM3E에는 5세대 D램(1b D램)을 적용한다. 1c D램은 1b D램보다 선폭이 좁다. 1c D램 기술을 적용할 경우 1b D램 제품보다 속도, 용량 등 효율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다.
황 CEO의 '피지컬 AI 선언'으로 글로벌 AI 시장이 LLM(거대언어모델)에서 LAM(거대행동모델)으로 다변화하면 스마트홈 플랫폼을 갖춘 DX(디바이스 경험) 사업부, 전장(자동차 전기·전자 장비) 계열사 하만 등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 LAM은 학습, 추론 기능 위주로 운영되는 LLM과 달리 물건을 옮기는 이동 기능을 겸비해야 한다.
삼성·SK, 엔비디아 '피지컬AI' 협업 속도 피지컬 AI는 기존 휴대폰, PC 등을 넘어 로봇, 자동차, 드론, 기계장비 등에 쓰인다. 엔비디아, AMD, 아마존웹서비스(AWS),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인텔, 브로드컴, 테슬라 등 무궁무진한 AI 수요처가 기존 추론용 LLM칩뿐 아니라 이동용 LAM(예를 들어 휴머노이드)칩 제작까지 맡길 경우 전장 솔루션 제작 노하우를 갖춘 삼성이 유리할 수 있다.
엔비디아는 황 CEO가 미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IT전시회 CES 2025 현장에서 새롭게 발표한 피지컬AI 개발 플랫폼 코스모스 외에도 DGX 시스템(데이터센터 AI기반 스택훈련), 옴니버스(시뮬레이션 및 합성데이터 생성), AGX(실시간 센서 안전 데이터처리 차량 내 컴퓨터) 등 차량용 컴퓨팅 솔루션을 갖추고 있다.
엔비디아는 황 CEO의 '피지컬 AI 시대' 선언 후 완성차 업체와의 협업을 늘리고 있다. 현대차그룹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또 코스모스 플랫폼을 통해 와비, 웨이브, 포어텔릭스, 우버 등과 협력하며 자율주행차용 피지컬 AI 생태계를 늘렸다. SK도 엔비디아 코스모스에 들어갈 HBM 납품 선점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엔비디아만 해도 코스모스뿐 아니라 자율주행차용 블랙웰 아키텍처 기반 드라이브 AGX 토르(Thor) 시스템 온 칩(SoC), AI 노트북용 그래픽처리장치(GPU) 지포스 RTX 50 등 여러 플랫폼을 갖추고 있다. AMD, 인텔 등 빅테크도 비슷한 제품 개발 속도를 높이고 있다. 빅테크 사이에서 AI 플랫폼 출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HBM 주문량도 증가한다. 빅테크들도 제품 효율을 높이기 위해 HBM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삼성, SK, 마이크론 등 메모리 업체 입장에서는 증산을 지속하고 수율(양품 비율)을 높이려면 최적의 공법을 개발하기 위해 고심할 수밖에 없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HBM4 16단 제품 적층에 새로운 공법 하이브리드 본딩을 적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SK하이닉스가 16단 제품에서 하이브리드 본딩 공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고 삼성도 같은 공법 완성도를 높여 추격하려고 하는 모양새다. 하이브리드 본딩은 구리를 직접 맞붙이는 차세대 패키징 공법이다. 칩끼리 연결하는 '범프' 없이 구리를 통해 칩을 쌓는 원리다. 구리는 반도체끼리 신호를 주고받는 경로다. 하이브리드 공법 완성도를 높이면 칩 사이즈를 줄이고 성능을 높일 수 있다.
SK에 밀린다고 평가받아온 열압착 비전도성 접착 필름(TC-NCF) 체계를 폐기하는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삼성은 그동안 TC-NCF 기술을 고수해왔다. TC-NCF 기술은 SK하이닉스의 매스리플로우-몰디드언더필(MR-MUF) 기술보다 수율, 생산성, 열 방출 성능 등에서 밀린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인력 재배치 카드까지 총동원하며 1c D램, HBM4에 '올인(다 걸기)'한 이유는 메모리에서 HBM 1위 SK하이닉스를 추격하는 게 현실적인 목표라는 진단이 깔려 있다.
최근에는 중국 CXMT의 고부가가치 제품(DDR5) 양산 소식까지 전해져 '메모리에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위기감이 업계에 퍼지고 있다. 빅3 모두에 해당하는 얘기고 HBM도 예외는 아니다. HBM 같은 주문형반도체(ASIC) 영역에서 빅테크 수주를 늘리는 것은 상당 기간 중국 메모리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 최선의 카드다.
특히 삼성의 경우 연말 1c D램 HBM4 시장 개화 전 갤럭시S25 등 휴대폰 관련 납품 성과를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도 나온다. 박유악 키움증권 연구원은 "갤럭시 S25 출시에 따른 세트 사업부(MX사업부)의 수익성 개선과 ASIC 고객들로의 HBM 판매 확대에 따른 D램 부문 실적 성장 등을 통해 삼성전자는 1분기에 실적 턴 어라운드(반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채석 기자 chaeso@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