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미국과의 통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현지 투자, 미국산 에너지 수입 비중 확대, 양국 간 경제 시너지 창출 등 세 가지 카드를 제시했다.
최 회장은 최근 방미 일정 중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45분간 단독 면담을 진행하고 "한국을 중요한 경제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전했다.
최 회장은 25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에서 열린 취임 4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러트닉 장관은 취임 선서 직전 바쁜 일정 속에서도 직접 한국 대표단을 만났다"며 "우리가 전하고자 했던 통상 논리와 전략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미 간 무역 불균형 문제에 대해 미국이 관세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최 회장은 "지난 8년간 한국은 미국의 최대 외국인직접투자(FDI)국으로, 대부분 제조업 그린필드(투자국에 생산시설·법인 설립) 투자가 중심이었다"며 "미국에서 공장을 돌리기 위해 필요한 장비나 중간재 대부분을 한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의 미국 투자와 무역흑자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상무장관은 한국 기업의 대규모 투자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최 회장은 "그가 10억 달러 이상 투자한 기업에는 인센티브를 주고, 100억 달러 이상이면 집사를 두는 것처럼 최상의 대우를 하겠다고 말했다"며 "기업가 출신답게 비즈니스 마인드가 강하게 드러났다"고 전했다.

최 회장은 "단순히 수입·수출의 균형을 맞추는 '제로섬' 게임보다는 양국이 공동 수익을 창출하는 모델이 필요하다"며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원유 등 에너지 수입 확대는 그런 맥락에서 한국에도 실익이 있다"고 강조했다.
중동 의존도를 줄이고 미국과의 전략 카드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번 면담에서는 통상정책의 상호주의 원칙도 확인했다.
최 회장은 "미국은 한국이 자국 제품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관세와 비관세 조치를 상응하게 적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며 구체적 품목 언급은 없었지만, 신호는 분명했다고 전했다.
비관세장벽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산업별로 사정이 다르고, 내부 정책이라는 점에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라면서도 "우리 논리에 타당성이 있는지 점검하고 디테일을 살필 시점"이라고 했다.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기업은 미국 규제에 맞춰 제품을 팔지만, 미국 기업은 한국에 맞춘 제품을 따로 만들기 어려운 현실이 있다"며 현실적 고민도 함께 언급했다.
최 회장은 제조업 공동화 우려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그는 "1970년대 이후 주력인 수출 주도형 경제모델이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며 "지금은 제조업에 인공지능(AI)을 얼마나 잘 접목하느냐가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AI 제조업 역량이 없으면 국내 공장을 지어도, 해외 공장을 세워도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AI 기술력에 대해선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최 회장은 "한국은 초거대언어모델(LLM)을 자체 보유하지 못했고, 기술력도 10위권 밖에 머무르고 있다"며 "LLM을 내부에 장착하지 못하면 AI 종속국가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소프트웨어 인프라와 엔지니어 육성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반도체·인공지능(AI) 산업을 중심으로 제기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 요구와 관련해서도 견해를 밝혔다.
그는 "버스만 타고 출근하라는 규칙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자"며 비유를 들었다.
최 회장은 "출근은 가능하지만, 급한 회의에 늦거나 교통체증이 심한 경우 오토바이나 택시 같은 선택도 필요할 수 있다"며 '그런데 그 선택을 원천적으로 막는 규제는 개인에게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법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기준은 맞더라도, 특수한 상황에선 불합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법은 좋은 취지에서 출발하더라도 현실에서는 그 취지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며 "제도의 본래 목적이 현실과 어긋난다면 바꾸거나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미국의 사례를 언급하며 '법의 역설'을 거듭 설명했다.
그는" 전기가 처음 보급됐을 때 감전 사고가 빈번하자, 미국은 전기를 만질 수 있는 사람에게만 라이선스를 발급했다"며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감전 사고는 오히려 늘었다"고 전했다.
라이선스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이 사례처럼, 제도가 의도한 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긴다"며 "규제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규제는 오히려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누르게 되고, 사회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봄은 왔지만, 경제는 얼어붙어 있다"며 "통상, 금융, 기술, 정치 등 복합적 리스크가 겹치면서 기업과 자영업자, 시민 모두 용량 초과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빠르게 좋아질 희망은 있지만, 전망과의 간극이 크다"며 "가장 큰 적은 불확실성"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결정을 미루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이게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위협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럴수록 정부와 민간이 따로 움직일 수 없다"며 "기업과 정부가 구조적으로 협력하는 '원팀' 전략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대한민국이 어떤 경제모델을 추구할지, 어떤 글로벌 포지셔닝을 할지 분명한 메시지를 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한편, 오는 11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대해서는 "글로벌 최고경영자(CEO) 1700여 명이 참석하는 만큼, 7조4000억 원의 경제 효과와 2만3000개의 고용 창출이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몰릴 경우 숙소와 교통 등 준비 여건이 부족할 수 있다"며 "경북·경남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전방위적 대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포항을 크루즈 정박지로 활용하는 방안 등 다양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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