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현지시간) ‘B급 영화의 대부’라 불리던 미국 영화제작자 로저 코먼이 사망했다.
향년 98세. 이후 한 달여 걸쳐 미국 영화매거진들은 그의 일생을 조명하는데 기꺼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만큼 코먼이 미국영화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는 판단에서다.
평생 ‘B급 영화’라 명명된 싸구려 선정주의 영화들만 제작해왔지만, 동시에 업계 진입에 어려움을 겪던 수많은 젊은 영화인들에 기회를 줌으로써 미국영화 황금기를 이끌었단 평가다.
그가 장편상업영화계에 데뷔시킨 영화인들 면면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대부), 마틴 스콜세지(성난 황소), 조나단 데미(양들의 침묵), 제임스 카메론(터미네이터), 론 하워드(뷰티풀 마인드) 등등 훗날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는 미래의 거장들이 줄줄이 나온다.
잭 니콜슨이나 실베스터 스탤론 같은 스타배우들 역시 무명시절 그의 영화에서 기회를 얻은 경우가 많다.
이 같은 공로에 힘입어 일개 B급 영화 제작자인 그가 2010년 제8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공로상까지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코먼에겐 자주 언급되진 않는 또 다른 업적이 있다.
지금 이르러선 신예들에게 기회를 준 점보다 더 중요한 역할로 여겨지는 부분이다.
1970~1983년까지 코먼이 운영하던 영화사 뉴월드픽쳐스 면면을 보면 사뭇 특이한 점을 알 수 있다.
분명 폭력과 도색영화들로 그득한 필모그래피인데 동시에 해외 예술영화 배급을 꾸준히 맡아온 이력도 보이기 때문이다.
잉그마르 베리만의 ‘외침과 속삭임’과 ‘가을소나타’,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마코드’,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루스 우잘라’, 프랑소와 트뤼포의 ‘아델 H. 이야기’와 ‘포켓 머니’, 폴커 슐렌돌프의 ‘양철북’, 알랭 레네의 ‘내 미국 삼촌’ 등이 그의 배급목록에서 계속 튀어나온다.
싸구려 선정주의 영화들만 만들어온 데 대한 속죄(?) 차원이 아니다.
코먼은 자신이 제작해온 싸구려 영화들과 해외 예술영화들을 사실상 같은 부류 영화들로 파악한 탓이다.
둘은 그저 다수 대중이 선택하지 않을 법한 제한된 수요층의 영화들일 뿐이며, 그렇기에 소규모의 특수한 전문배급을 필요로 하는 영화들이란 점에서 동일한 입장이란 것. 그러니 예술성 운운으로 둘을 가르는 일은 영화산업에 있어 아무 필요 없는 군더더기 개념이란 입장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고방식에서 나온 배급전략은 실제로 시장에서 먹혔다.
코먼이 미국에 배급한 해외 예술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고, 그 덕에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도 3차례나 수상했다.
특히 잉그마르 베리만은 자신의 영화가 고루한 아트하우스가 아니라 B급 영화들이 주로 택하던 드라이브인 극장에서까지 상영되며, 비록 홍보 포장은 조금 다르게 설정됐을지언정,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대중에 폭넓게 선보여지게 됐다는 점에 감격하기도 했다.
그렇게 1970년대 후반에 이르자 뉴월드픽쳐스는 해외예술영화 마켓에서 가장 선호하는 미국 배급업체 자리에 오르게 됐다.
이 같은 코먼식 사고의 전환은 향후 미국 저예산 독립영화계 생존전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단 해석이다.
이전까진 주로 유럽예술영화들에 영향 받은 존 카사베테스, 찰스 버넷 등의 독립영화들이 간간히 나오는 정도였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상업적 장르에 천착하며 그 토대로 자신의 개인적 비전을 풀어내는 영화, 즉 작가주의적 상업영화 방향이 설정됐다는 것이다.
가볍고 선정적인 영화를 원하는 관객들이 주로 찾는 드라이브인 극장에서 틀어도 여전히 거기 모인 관객들을 함께 만족시킬 수 있을 법한 영화들 말이다.
미국 독립영화계 전환점으로 여겨지는 1994년 ‘펄프 픽션 쇼크’도 이런 바탕에서 비롯됐단 해석이 많다.
그런 역사가 존재하는지라 지금도 미국 독립영화계는 저 작가주의적 상업영화들이 유난히 많을 뿐 아니라, 심지어 독립영화계에서 주로 택하는 서브장르들까지 따로 성립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표적으로 ‘멈블코어’란 서브장르가 있다.
‘컴퓨터 체스’ ‘그녀들을 도와줘’의 앤드류 부잘스키가 그 선봉 격이다.
일종의 부조리 코미디인데, 역시 저예산인 만큼 플롯보단 대사 위주이며 현대사회 성인들 관계에서 난장판 코미디를 찾아낸다.
비전문 배우들의 즉흥연기 등도 다수 포함시켜 가히 다큐멘터리적 감각을 유지하는 게 매력이기도 하다.
‘레이디 버드’ ‘작은 아씨들’ ‘바비’ 등으로 지금은 메인스트림에 올라선 그레타 거윅도 초기엔 멈블코어를 연출한단 평가를 받았다.
길게는, 비록 독립영화로 분류되진 않지만, 우디 앨런 영화들의 상업적 성공을 그 기반으로 봐야한단 의견들도 많다.
한국선 홍상수 감독 영화들 중 일부를 이런 계열로 보기도 한다.
한편, ‘하이 콘셉트 호러’란 서브장르도 미국독립영화계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아트호러’란 명칭으로도 불린다.
호러영화의 상업적 포인트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감독의 차별화된 작가적 비전도 함께 엿볼 수 있어 어필 폭이 상당히 넓은 부류다.
한국서도 잘 알려진 아리 애스터, 로버트 애거스, 조던 필,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등의 영화가 주로 이 서브장르로 지목된다.
한국선 지난해 유재선 감독의 ‘잠’ 등을 여기 위치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위 멈블코어의 로파이 경향이 합성된 제3의 형태로 ‘멈블고어’란 서브장르도 종종 언급된다.
근래 ‘X’와 ‘펄’ 연작으로 새롭게 주목받은 타이 웨스트, ‘타임루프: 벗어날 수 없는’ ‘스프링’ 등으로 알려진 저스틴 벤슨-애런 무어헤드 콤비가 멈블고어 감독들로 지목된다.
어찌됐든 한국영화계는 지금 큰 차원에선 한국영화 전체의 위기, 거기서 다시 저예산 독립영화의 ‘절대적 위기’란 얘기들이 많다.
극장용 영화들이 극단적 쏠림현상을 보이며 전체 관람률은 떨어지는 현실에서, 저예산 영화들은 수년 전부터 OTT 스트리밍 계약을 통해 수익을 보전하려는 흐름이다.
그런데 OTT는, 로저 코먼식 사고방식을 빌려 보면, 일반 상영관보다도 드라이브인 극장 속성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리고 드라이브인이나 OTT로 모여든 대중은 부담 갖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장르 기반 영화들이라면, 또는 그렇게 인식될 소지라도 있는 영화들이라면, 베리만이나 트뤼포 영화들도 선뜻 선택하곤 한다.
코먼 일대기와 그가 남긴 수많은 코멘트들이 한 달 넘게 미국 영화매거진들을 장식하는 현 상황에서, 특히 저예산 영화산업이라면 국내서도 한 번쯤 그의 방식에 귀 기울여 볼 만한 시점이 맞다.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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