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같지 않은 연말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이야기가 오가고, 연말 방송사 시상식엔 누가 나올까, 자신이 응원하는 아티스트의 수상을 바라며 떠들썩해야 할 12월이 예년과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2007), ‘택시운전사’(2017) 등 매체로만 접해본 비상계엄을 실제로 겪게 된 것에 모두가 큰 충격에 빠졌다. 더구나 배우 황정민 주연의 ‘서울의 봄’(2023)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시점에 계엄이라니, 모두가 얼어붙었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한 신군부의 군사 반란과 이를 막으려는 수도경비사령관을 비롯한 진압군의 긴박했던 순간을 그린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과 권력의 충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천만 영화’에 등극했을 정도로 관심이 컸던 영화다. 작품을 본 관객들은 악몽과도 같았던 역사를 다시금 찾아보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역할을 고민했다. 반전이 있을 수 없는 아프고 어두운 역사를 그리지만 민주주의를 일깨웠다는 평가를 들으며 다양한 상도 받았다. 지난달 29일 열린 제45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남우주연상(황정민), 편집상, 최다관객상 등 4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5월엔 제60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영화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계엄이라니. ‘IT 강국’, ‘세계로 향하는 K-컬처’ 등 온갖 수식어로 위상이 높아진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동원해 반대세력과 행정, 사법, 언론을 통제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K-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K-팝, K-영화, K-드라마, K-문학 등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명성을 얻고 있다.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 그룹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한류에 대한 열광이 엄청나다. 하지만 지난 3일 발생한 비상계엄 사태가 이러한 위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소설 ‘소년이온다’, ‘채식주의자’ 등을 집필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성취까지 무색하게 만든다. 연말 다채로운 특집 방송과 특선 영화가 가득해야 할 TV에는 대통령 탄핵 관련 뉴스와 토론들이 이어지고, 국민은 연말연시 모임이 아닌 국회로 향하고 있다. 공연장에 흘러나와야 할 K-팝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들리고 아티스트를 향해 흔들어야 할 응원봉은 ‘꺼지지 않는 촛불’로 임무를 다하고 있다. 예정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스타들은 행사장에서 웃음보단 진지한 얼굴로 현 시국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황동혁 감독은 오징어게임 시즌2 제작발표회에서 “비상계엄 사태를 믿을 수 없다”며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길 바랐다. “온 국민이 잠을 자지 못하고 거리로 나가 불안과 공포, 우울감을 가지고 연말을 보내게 된 게 불행하고 화가 난다”라는 황 감독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누구도 원치 않았을 올해 연말 풍경이다. 지난 한 주 동안 버스정류장에 앉아 나이 지긋이 든 어르신들의 신랄한 이야기를 크리스마스 캐럴 삼아 들었다. ‘올 한해 잘 마무리하시고, 활기찬 새해 맞이하세요’라는 연말 인사를 31일 전까지 지인에게 건넬 수 있을까. 아직은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이다. 신정원 기자 garden1@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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