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국내 개봉하는 '미키 17' 관련 인터뷰 진행
"출발점부터 종착역까지 관객들을 완전히 움켜잡고 같이 가는 게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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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영화 '미키 17' 개봉을 기념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
정제되지 않은 스타는 어떤 모습일까. 연예계는 대중의 관심을 받는 스타도 많고, 이들을 팔로우하는 매체도 많다. 모처럼 인터뷰가 잡혀도 단독으로 대면하는 경우가 드물다. 다수의 매체 기자가 함께 인터뷰를 하다 보니 내용도 비슷하다. 심지어 사진이나 영상마저 소속사에서 만들어 배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현실에서도 <더팩트>는 순수하게 기자의 눈에 비친 느낌을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달한다. <편집자 주>
[더팩트|박지윤 기자]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50분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 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봉준호 감독의 친근한 매력과 유쾌한 입담을 즐기고, 극강의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 작품과 관련된 다양하고 깊은 이야기를 유려한 말솜씨로 듣기에는 말이다.
지난 19일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8번째 장편 영화 '미키 17' 국내 최초 개봉을 앞두고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더팩트>와 만났다.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는 이날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점심시간 제외)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쉬는 시간마다 빠르게 달려 나가 차기작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그야말로 1분 1초를 쪼개면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인터뷰가 시작되면 전혀 지친 기색 없이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발산하면서도 유려한 언변과 유쾌한 입담으로 많은 취재진의 눈과 귀를 집중시킨 봉 감독은 한국 영화의 위상을 드높였던 '기생충' 이후 6년 만에 신작을 선보이게 된 소감부터 오랫동안 준비한 작품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약 50분가량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봉준호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잠시 탑승하며 전 세계를 매료시킨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가끔 질문에 답을 하다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여기까지 왔을까요?'라고 길을 잃는 친근한 면모와 자신의 양옆에 앉은 기자들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장난기있는 모습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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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은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익스펜더블로,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미키가 17번째 죽음의 위기를 겪던 중 그가 죽은 줄 알고 '미키 18'이 프린트되면서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이야기를 그린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
여러 차례 개봉일이 변경되다가 마침내 세상에 나오게 된 '미키 17'이다. 오스카와 해외 개봉 등 '기생충'(2019)과 관련된 모든 일정이 2022년 2월에 끝난 만큼, 차기작을 개봉하기까지 6년이 아닌 5년이 걸렸다고 정정한 봉 감독은 "그동안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지금 열심히 만들고 있는 애니메이션도 2019년에 시작했다. 5년이면 체감적으로 길게 느껴지니까 그동안 놀았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6년은 더 그렇지 않나. 5년간 두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했다. 괄호 열고 논 적이 없고 계속 일했다고 적어달라"고 강조해 웃음을 안겼다.
그러면서 '미키 17'을 '봉 8'이라고 재치 있게 표현한 그는 "데뷔작을 개봉할 때처럼 긴장되고 여전히 떨리고 무섭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고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2000년 '플란다스의 개'를 시작으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 '미키 17'로 이어진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다. '괴물'과 '기생충'을 천만 반열에 올리고, 자신의 첫 할리우드 영화 '설국열차'도 국내에서 93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으며 세계적 거장으로 거듭난 그는 '기생충'으로 2019년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하는 쾌거를 거뒀다.
그렇기에 봉준호 감독의 다음 행보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이와 관련한 질문을 들은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제가 50대에 접어들면서 좋은 사건이 터진 거라 비교적 침착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다. '기생충' 전과 후로 제 작업이나 생활 방식이 바뀌지 않았고 늘 하던 대로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미키 17'"이라며 "연출을 20년간 하고 50세에 이런 상황을 맞이했기에 차분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특별한 프레셔도 없었다. 다만 할리우드 배우 파업 때문에 2023년에 후반작업을 다 끝냈는데도 개봉을 연기하게 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런 것들 외에는 모든 것이 순탄했다"고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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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미키 17'에 출연하는 나오미 애키와 로버트 패틴슨, 마크 러팔로(위쪽 사진의 왼쪽부터)를 향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28일 개봉한 '미키 17'은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익스펜더블(소모품)으로,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미키가 17번째 죽음의 위기를 겪던 중 그가 죽은 줄 알고 '미키 18'이 프린트되면서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2022년 발간된 에드워드 애시튼 작가의 SF 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하지만, 극의 배경을 더 현재로 끌어당기고 캐릭터들의 설정을 바꾸거나 없던 인물을 새롭게 추가하면서 '인간 냄새 나는 SF'라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또 한 번 견고하게 쌓아 올린 봉 감독이다.
'괴물' '설국열차' '옥자'에 이어 '미키 17'까지 필모그래피의 절반이 SF라고 되돌아본 그는 "그런데 따지고 보면 SF이지 않은 것 같은 영화를 해왔다. SF의 탈을 썼지만 결국은 땀내 나는 인간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며 "원작은 두껍고 소설의 절반이 과학에 관한 설명이다. 그런데 저는 휴먼 프린팅이라는 콘셉트에 집중했다. 철학적 세계관보다 찌질하고 착하기만 한 청년이 극한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지, 미키의 심정을 들여다본다고 접근했다. 이게 원작과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봉 감독은 원작에서 역사학자였던 미키에게 마카롱 가게 사업 실패로 사채업자에 시달리다가 지구를 떠나게 된 서사를 부여했고, 추종자들을 거느린 얼음 행성 개척단의 사령관 케네스 마셜(마크 러팔로 분)의 아내 일파(토니 콜렛트 분)를 새롭게 추가했다. 그는 "독재자가 커플일 때 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무섭게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덧붙였다. 또 원작에서 지네로 묘사됐던 크리퍼는 단순한 눈요깃거리가 아닌 중요한 스토리 지점에 놓인 캐릭터인 만큼, 크루아상에서 출발해 완성된 디자인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비하인드를 밝혀 흥미를 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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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아래 사진의 왼쪽)은 "데뷔작을 개봉할 때처럼 긴장되고 여전히 떨리고 무섭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새롬 기자, 서예원 기자 |
다만 일각에서는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사령관 케네스 마셜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이날 봉 감독은 관객들을 통해 거론되고 있는 정치인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2021년에 각본을 썼고 2022년에 촬영했다"고 타임라인을 계속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대상을 표했고, "유럽에서 만난 이탈리아 기자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다들 본인 자국의 정치적 스트레스를 투사해서 얘기하시는 것 같다"고 바라봤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와 마크 러팔로가 모델로 삼은 정치인들이 있었는데 현역이 아닌 과거 정치인들이었어요. 독재자는 위험하지만 매력이 있기에 지지자들이 있는 거거든요. 영화 속 악역들이 매력이 있어야 기억에 남듯이 독재자도 위험하지만 매력이 있어야되는데 이를 러팔로 형님이 잘 해주셨어요. 저도 작년에 색 보정을 하려고 영화를 다시 보니까 좀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우연이지만 과거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충실하게 표현하다 보면 역사는 반복되니까 사람들이 현재나 미래의 모습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가 하면 이번 작품에는 그동안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로맨스와 꽉 닫힌 해피엔딩이 담겨 있어 또 다른 재미를 안긴다. "SF보다 미키와 나샤(나오미 애키 분)의 사랑을 찍은 게 뿌듯했다"는 봉 감독은 "미키는 잔인하게 표현하면 산업재해 전문이다. 그런데 보상도 안 해준다. 위험하고 죽기 딱 좋은 미션을 받는 이 친구가 어떻게든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으면서 위로받기를 바랐는데 이를 이루어준 게 나샤"라며 "그렇기에 둘의 사랑이 중요했고 잘 찍고 싶었다. 나오미 애키가 연기를 진짜 잘했다"고 극찬했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슬프게 주저앉고만 '기생충'의 최우식과 죽음으로 끝을 맺는 '괴물'의 고아성 등 그동안 가혹하게 다뤘던 주인공들을 떠올린 봉 감독은 "제 아들이 미키의 나이고 제가 50대 중반이 되니까 마음이 약해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불쌍한 청년이 끝까지 파괴되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17번이나 죽었는데 또 죽일 수 없었다. 처음부터 해피엔딩으로 설정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 지점에 도달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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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핵심 목표는 관객들이 극장에 앉아 있다고 가정했을 때 2시간 내내 절대 핸드폰을 못 보게 만드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주) |
'미키 17'은 미국 플랜B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고 워너브러더스에서 배급한 할리우드 영화다. 한글로 대본을 쓰고 영어로 번역한 후, 촬영 후 다시 한글 자막을 입히기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한 봉 감독은 "제가 쓴 글이 먼 길을 돌아서 다시 저에게 왔다"고 되돌아보며 "자막 감수에 제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 따로 인건비를 받지 않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짧게 들어도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흥미로웠다. 특히 홍보 비용 등을 뺀 순 제작비만 1억 1800만 달러(한화 약 1693억 6540만원)가 들었다는 봉 감독은 원래 스튜디오가 설정한 금액이 1억 2000만 달러였는데 예산 내 딱 끝냈다고. 스토리보드와 현장 편집을 활용하는 '평소 하던 작업'을 고수했기에 가능했다는 그는 "할리우드 기준으로 부면 중간 규모에서 블록버스터 사이 정도의 중대형급 영화다. 그 규모에 대해서 내가 체감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은 기억은 없다"고 회상했다.
매 작품 관객들이 발 딛고 있는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과 묵직한 메시지 그럼에도 자신의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며 전 세계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봉준호 감독이다. 이렇게 늘 강한 주제 의식으로 쉽게 지울 수 없는 잔상을 남기는 그에게도 늘 메시지보다도 중요한 건 관객이라고. 이에 봉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핵심 목표는 관객들이 극장에 앉아 있다고 가정했을 때 2시간 내내 절대 핸드폰을 못 보게 만드는 것이다. 출발점부터 종착역까지 완전히 움켜잡고 같이 가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누군가 핸드폰을 켜면 마음의 상처를 받아요. '저분은 어디서 온 누구시지? 왜 꺼냈지?' 생각하면서요. 메시지는 두 번째 문제죠. 장르적인 영화적 흥분을 통해서 관객들을 끌고 가고 싶어요. 자려고 누웠는데 아까 본 영화의 대사가 아른거리거나 주인공이 처한 처지가 지난주에 봤던 뉴스 화면과 겹치는 것 등 그렇게 돌이켜보면 그 영화는 적어도 제 기준에서 성공한 거예요. 사실 영화라는 게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어떠한 메시지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아요. 교훈을 갖고 쓰는 건 없어요. 이 영화는 미키가 왜 저렇게 됐을까를 차곡차곡 쌓아갔고 그러다 보면 하나의 그림이 크게 그려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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