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까닭에 전쟁 직후 유럽이 열어젖힌 서사는 재건과 부흥에 관한 내용이 아닌, 무정부 상태로 전락한 역사였다… 모름지기 ‘복수’는 이 책의 일관된 주제다.
전후 유럽의 분위기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복수의 논리와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이 잿더미에서 다시 번영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과정은 ‘독일 라인강의 신화’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종전 직후 유럽의 처참한 실상은 ‘전후 폐허’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다 보니 좀처럼 조명되지 못하거나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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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로 / 노만수 옮김 / 글항아리 / 3만8000원 |
전후 ‘수평부역자’로서 가혹한 처벌을 받은 독일 프랑스 점령시절 독일군과 얽힌 여성들 사례가 그러하다.
“이발사는 주머니에서 접이식 면도칼을 꺼내 펼친 뒤, 여자의 머리카락을 걷어 올리고는 몇 차례 현란한 면도 솜씨로 머리카락을 잘라 군중 속으로 내던졌다…. 삭발 여성은 꽤 기개가 있었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깎이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독일인 만세’라고 외쳤으니까. 그러자 누군가가 벽돌을 집어 들고 그녀를 때려눕혔다.
”
저자는 오히려 전후 인간 세상이 더욱 모질어져 “세계대전 종결이 또 다른 잔학행위의 기점”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모종의 상실이나 부당한 상황을 견뎌내야 했다.
불가리아처럼 직접적인 전투가 거의 없었던 나라조차 정치적 혼란과 이웃 국가와의 폭력적 언쟁, 나치로부터의 강압, 새롭게 등장한 강대국의 침략에 노출됐다.
이 모든 사건의 한복판에서 적으로 상정한 대상을 증오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전후 초기는 유럽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 구대륙을 파괴한 것이라면, 전후의 변화무쌍한 혼돈은 신유럽을 형성한 것이다.
폭력과 복수로 충만한 이 시기에 유럽인들에겐 많은 희망, 포부, 편견, 원한이 생겨났다.
오늘날의 유럽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우선 이 결정적인 신유럽 형성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아야 한다.
곤란하거나 민감한 주제를 피하려는 시각은 비겁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이것들이 바로 현대 유럽을 건축한 토대이기 때문이다.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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