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에 편성된 예산의 75%에 이르는 431조원을 상반기에 서둘러 풀기로 했다. 계엄·탄핵 정국 속 내수 부진은 깊어지고 경제 견인차 역할을 해 온 수출마저 피크아웃(정점을 찍고 하락 국면에 진입)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재정 조기 집행을 통해 경기 부진을 타개해보겠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17일 국무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의 '2025년도 예산배정계획'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예산 배정이란 각 부처가 예산을 사용할 수 있도록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향후 자금 배정 절차를 거쳐 실제 집행된다.
정부는 기금을 제외한 일반·특별회계 총계 기준 세출 예산 574조8000억원 중 75%인 431조1000억원을 상반기에 배정하기로 했다. 내년 상반기 예산 배정 비율인 75%는 지난해와 올해에 이어 3년 연속 역대 최대 수준이다.
정부가 내년 상반기 역대 최대 규모의 예산을 배정하기로 한 것은 내수·수출 동반 부진 속 탄핵 정국 장기화에 따른 국정 공백 불확실성 등을 고려한 것이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 등에 따르면 재화소비를 나타내는 소매판매는 2022년 2분기(-0.2%)부터 꺾인 이후 10개 분기째 줄어들고 있다. 이는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95년 이후 역대 최장기간 감소세다.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을 차지하는 민간소비 위축도 문제지만, 수출 약세는 더 큰 문제다. 수출이 견인해 온 한국 경제가 구조적 저성장기에 진입한 상황에서 지난달 수출 증가율은 전년대비 1.4%를 기록하며 한 자릿수 초반대로 떨어졌다. 내달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앞으로 전개될 미국발 통상 마찰과 중국 수출 둔화 등 대외 위험 요인들을 감안하면 내년 수출 둔화 기조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정부는 상반기 분야별 예산 배정률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경기 부양 효과가 큰 사회간접자본(SOC), 연구개발(R&D) 예산과 중소기업, 민생 예산을 상반기에 중점적으로 배정할 것으로 보인다. 일자리 창출, 취약계층, 소상공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도 조기에 집행한다.
기재부는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예산의 신속 집행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전체 세출예산의 75.0%를 상반기에 배정했다"며 "서민 생계부담 완화, 취약계층 지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과 소상공인 맞춤형 지원, 첨단산업 육성 등 경제활력 확산을 위해 조속한 집행이 필요한 소요에 대한 조기 배정에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경제계는 불안한 정치적 상황으로 산업계 성장 동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반도체특별법, 인공지능(AI) 기본법, 국가기간전력망확충특별법 등 경제 관련 법안들의 연내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정부는 탄핵 정국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을 줄이기 위해 경제계에 협력을 요청했다. 전날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을 만난 경제6단체장들은 "국정공백 최소화와 정책의 안정성·연속성 유지가 중요하다"며 기업이 투자와 경영에 매진할 수 있도록 경제안정 대책을 적극 추진해달라고 요청했다. 박일준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은 "경기 시나리오별 적극적인 정책 대응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며 "지연되고 있는 반도체 특별법 등 주요 경제법안의 연내 입법도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세종=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