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최규리 기자]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데, 여기서 술 한잔할 때만큼은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막걸리 1잔에 1000원, 거기다 안주도 무료니깐.”
27일 오후 2시경 잔술 문화가 살아있다는 서울 탑골공원을 찾았다.
분명 같은 하늘 아래 있는데 나 혼자 다른 시공간에 있는 느낌이다.
이곳에 모인 노년 남성들도 기자를 이방인 보듯 흘끗 쳐다본다.
이들은 대낮인데도 불구, 삼삼오오 모여 낮술 즐기기에 한창이다.
새로운 문화를 접한다는 설렘과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이곳의 핫플이라 불리는 노포집 ‘부자촌’에 도착했다.
부자촌은 17년째 송해길 입구서 운영하고 있다.
막걸리 한 잔에 1000원, 소주 반 병에 2000원. 고물가 시대를 역행하는 물가다.
기자의 얼굴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는지, 부자촌 사장은 “뭐 드릴까?”라며 친절하게 맞아준다.
카드·모바일 결제가 익숙해진 터라 평소 현금을 쓰지 않지만, 이날을 위해 찾아둔 1000원으로 막걸리 한 잔을 주문했다.
“저 한 잔만 먹어도 되나요?”라며 처음 잔술 문화에 입성한 새내기 티를 내면서.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다 한 잔만 먹어요!”
매일 아침 7시 이곳에 출근한다는 부자촌 사장 전명연(72세) 씨가 잔술을 내어주며 말했다.
단돈 1000원에 한 사발 가득 담긴 막걸리다.
쭈뼛거리며 막걸리만 홀짝이는 내가 답답했던지 옆에 있던 70대 손님이 “안주 다 공짜다.
왜 술만 먹냐. 강냉이도 집어 먹고, 김치전도 먹어라”며 잔술 문화를 친절히(?) 알려준다.
그는 “여기는 꼰대들 집합소야. 난 여기 매일 오는데, 올 때마다 몇십명씩 이러고 있는 것 같아”라며 “나는 물보다 막걸리가 더 잘 넘어가. 갈증 날 땐 무조건 여기서 막걸리를 마신다”고 말했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다는 그는 막걸리 한잔에 양껏 이곳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또 다른 손님은 익숙한 듯 3000원을 내고 막걸리 한 병을 주문한다.
“식당에서 막걸리 한 병 먹으려면 적어도 5000원, 안줏값 1만원 이상은 줘야 하는데, 여기는 값도 싸고 안주도 무료라서 좋다”며 “난 자주 여기서 이렇게 먹는 편”이라고 방싯했다.
20분 정도 지나 또 다른 한 손님이 ‘소주 반 잔’을 주문하자, 이른바 ‘빨간 뚜껑’이라 불리는 고도수 소주가 등장한다.
사장 전 씨는 종이컵 한잔 가득 소주를 따르면서 2000원을 지불받는다.
고물가 시대에 값싼 술과 무료 안주가 제공되는 잔술 문화지역은 이들에게 중요한 쉼터다.
부자촌 또한 이곳에서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며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4년째 이곳을 맡고 있다는 사장 전 씨는 “우리 집이 녹번동이라, 가게문을 너무 이르게는 못 열고 보통 아침 7시에 문 여는 편”이라며 “(전동스쿠터를 가리키며) 매일 저거 타고 첫 차로 출근한다”고 했다.
매출은 어떠냐는 질문에 “하루에 100잔 이상 나가면 괜찮은 편인데, 보통 100잔까지는 안 나간다”며 “아침에 비가 오면 손님들이 없어서 안 팔릴 때도 있다”며 쓴웃음을 보인다.
과거 1960~70년대 ‘점빵’에서만 팔던 기성세대의 낡은 문화 잔술이 부활했다.
이 같은 소량 판매가 허용됐다는 것은 그만큼 고물가에 시달리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식당에서 ‘잔술’ 판매를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내용의 주류면허법 시행령 개정안이 지난 21일 국무회의에서 통과됐다.
정부에 따르면 개정안은 주류 판매업 면허 취소의 예외 사유로 주류의 단순 가공·조작의 범위를 규정하면서 ‘주류를 술잔 등 빈 용기에 나누어 담아 판매하는 경우’를 명시했다.
술을 병째로 파는 것 외의 잔에 나눠 담아 파는 이른바 ‘잔술’ 판매를 허용하는 내용이다.
잔술 판매는 기존에도 국세청 기본통칙 해석상 가능했으나 정부는 이를 법령상 명확화하기 위해 시행령을 개정했다.
이외에도 주류를 냉각하거나 가열해 판매하는 경우, 주류에 물료를 즉석에서 섞어 판매하는 경우가 허용됐다.
개정안에는 종합 주류 도매업자가 주류 제조자 등이 제조·판매하는 비알코올 또는 무알코올 음료를 주류와 함께 음식점에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현재 종합 주류 도매업자는 도수가 1% 이상인 주류만 유통할 수 있는데 앞으로는 도수가 낮거나 없는 비알코올·무알코올 음료도 유통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와인, 위스키, 칵테일, 생맥주 한 잔만 주문했던 걸 생각하면 잔술 판매가 금지였던 것에 궁금증이 증폭된다.
사실 이는 주세법상 판매자가 임의로 술을 가공·조작할 우려가 있어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사정이 넉넉지 않거나 혼술을 즐기는 소비자에게 잔술 판매 허용은 환영이지만, 일부는 엇갈린 반응이다.
대부분 위생과 재가공에 대한 우려다.
평소 음주를 즐긴다는 권 씨는 “잔술은 믿을 수가 없다.
먹고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냐”며 “아직은 병으로 나온 술만 주문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잔술 판매가 허용됐지만, 소비자는 여전히 1병 주문이 익숙하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주 한 병에 7~8잔 정도가 나온다.
그런데 이를 잔술로 판매할 시 자영업자도 번거로워질 우려가 있다.
일일이 한잔씩 따르고, 잔당 계산할 때 등 원활하게 판매하기엔 어려움이 있다”며 “또 소비자 측에서 익숙하지 않은 잔술 문화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소비자가 보는 데서 이를 제공해야 하지 않겠나. 아직까진 지켜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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