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나무가 ‘신의 눈물’에서 자라났다고 믿은 에티오피아의 오로모족에게는 부족을 수호하는 생명의 음식이었다.
수면욕을 이겨내야 알라를 접할 수 있다고 믿은 이슬람 수피교도들은 진하게 달인 검은 커피를 수행의 도구로 삼았다.
“커피를 몸에 담은 자는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소문이 나돌 즈음 커피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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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실 때 한 잔을 완성시키는 데 수고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이 ‘에티켓’으로 자리 잡고 있다. 파란만장한 커피사(도서출판 이글루) 제공 |
17세기 청교도 혁명 시기에 옥스퍼드 대학가에 도착한 커피는 효능으로 사람들을 카페로 불러들였다.
당시 카페에 내걸린 홍보물을 보면 병을 치료하는 한의원을 방불케 한다.
간과 폐, 순환계 질환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으로서 커피가 위세를 떨치던 시기이다.
커피를 마시는 남편들이 마른 염소처럼 시들시들해지고 있다며 카페를 폐쇄해야 한다는 여성들의 청원서가 관청에 접수되기도 했다.
커피는 마침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구체적인 현상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아비투스(habitus)로서 개인의 고귀함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 것은 루이 14세 때였다.
귀족들이 술레이만 아가가 파리에 지은 호화 저택으로 몰려가 금쟁반에 받쳐 나오는 커피를 마시며 ‘구별 짓기’를 시작했다.
그들에게 커피의 효능이나 맛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커피를 즐기는 공간과 도구가 사치스러울수록 그들은 열광했다.
현대 커피의 가치는 어디에 두어야 할까?
특정 질병에 대한 효능으로 치자면, 커피보다 유익한 것이 널려 있다.
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커피에 의지하는 시기는 더더욱 아니다.
스페셜티 커피를 찾는 간절함이 깊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야흐로, 커피는 사유의 도구로서 새롭게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커피 애호가들은 커피가 선사하는 정서적인 현상에 집중한다.
커피의 가치가 잔 속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몸으로 들어와 일으키는 구체적 현상이라는 믿음을 갖는 까닭이다.
사람들을 소스라치게 만드는 비싼 가격이, 불편하다 싶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포장과 공간에 그 가치가 깃든 게 아니다.
한 잔의 커피는 몸으로 겪는 사물일 뿐이다.
그것을 몸에 들이지 않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메를로 퐁티의 견해처럼, 입안에 퍼지는 향미와 온몸을 감싸는 온기는 이성이 작동하지 않아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커피의 축복을 받을 경우,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커피를 즐기던 어느 날, 문득 ‘사람은 커피를 사랑하는 본질을 타고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커피를 사랑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뿌듯함이 커피에 나의 삶을 건 이유가 됐다.
하지만 커피를 사랑할수록, 점점 우리의 본질이 ‘커피 사랑’이라고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커피보다 사람이 먼저다.
커피의 향미에 한없이 행복해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실존적 공감’을 갖는 것이 커피에 주어진 소임이라는 신념이 생겼다.
커피보다 그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