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집권 세력 정파성이나 군사적 긴장 위기 속에서도 유지해온 남북관계 특수성을 무시하고 나란히 자국 협상라인 때리기에 나서는 양상이다.
남북 통신선이 단절된 데 이어, 남북이 각자 가진 긴장관리 창구를 스스로 위축시키는 자해적 조치라는 비판이 나온다.
◆용산, 통일부 때리기
대통령실의 통일부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이 표면화된 건 5월이다.
외교의 시간이 끝나고 ‘5말6초’ 개각으로 국정쇄신에 나설 것이란 보도가 쏟아지던 때다.
소재는 이미 한달 전 공개된 북한인권보고서 영문판(4월 26일 공개)의 면책조항이었다.
중앙일보가 5월 26일 아침 ‘"널리 쓰라"던 北인권보고서 영문판엔 "정확성 보증 못해"’라는 제목의 단독 보도를 내놓았고, 대통령실은 이날 오전 통일부를 감찰했다.
한국 정부가 보고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별도 조항을 보고서 서문에 안내하는 바람에 보고서 신뢰도를 떨어뜨렸다는 취지의 지적이었다.
전임 정부 시각이 남아있는 듯하다는 평가도 덧붙였다.
감찰 사실은 5월 29일 ‘北인권보고서 면책조항에…대통령실, 통일부 12시간 감찰’이란 제목의 중앙일보 이어진 단독 보도로 알려졌다.
통일부 내에선 이번 보고서 발간이 감찰로 이어진 데 대해 당혹해했다.
영문판 번역을 서둘러 내놓은 것은 현 정부 기조에 따라 ‘적극 행정’을 편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흘러갔다는 것이다.
 | 구병삼 통일부 대변인이 지난 6월 3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장마철 임진강 홍수 피해 예방 관련 입장 발표를 하기 위해 회견장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일찌감치 권영세 장관이 여의도 복귀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탓에, 통일부 안팎에선 후임 장관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존재했다.
후임 물망에는 통일부 전·현직 차관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김기웅 현 차관, 김천식 전 차관(현 세한대 석좌교수) 등이다.
통일부 출신이면서도 현 정부 기조를 잘 이행할 걸로 보이는 정무직 출신들이었다.
하지만 실제 개각이 임박하자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가 유력하게 떠올랐다.
6월 29일, 김 교수를 포함해 통일부 장·차관이 동시에 모두 외부 인사를 기용하는 인사가 발표됐다.
장관은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온 김 교수였다.
차관은 마찬가지로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외교부 입부해 북미국장 등 ‘성골’ 코스를 밟은 문승현 전 태국대사였다.
장·차관 둘다 동시에 외부인사가 기용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장관을 교수나 정치인 등 외부인사로 임명할 경우, 장관을 보좌하는 성격 차원에서라도 차관은 통일부 내부 사정에 정통한 통일부 출신을 기용하는 일이 관례처럼 굳어져있다.
장·차관 둘다 동시에 외부인사를 기용한 것은 1998년 통일원에서 통일부로 개칭된 이래 정권교체 시기를 제외하곤 처음이다.
통일부 출신으로 대통령실에서 근무하는 백태현 통일비서관 자리까지 김수경 한신대 교수가 내정됐다.
김 교수는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학자로 북한인권을 연구했고 방송 패널 출연도 활발한 인사다.
남북관계, 대북정책에 관여하는 주요 자리에서 통일부 출신은 전멸한 셈이다.
 |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6월 29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첫 개각 단행과 관련, 신임 인사를 발표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 비서실장, 김은혜 홍보수석, 김영호 신임 통일부 장관 후보자, 김홍일 신임 국민권익위원장.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15명의 장·차관급 개각을 단행하고 신임 통일부 장관에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를, 국민권익위원장에 김홍일 전 부산고검장을 내정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에는 장미란 용인대 교수를 깜짝 발탁했다.
뉴스1 |
◆법치 위에 선악론?
감찰, 인사로 이어진 메시지는 명확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갔다.
윤 대통령은 2일 “그동안 통일부는 마치 대북지원부와 같은 역할을 해왔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이제는 통일부가 달라질 때가 됐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핵심관계자도 “교류가 선(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김 장관 내정자도 지난달 30일 “통일부는 변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부처에 개혁과 쇄신을 주문하는 일은 항상 있어왔다.
공직자들이 마인드를 바꿀 것을 주문하거나 조직문화 개혁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 운영을 위해 법에 규정된 업무나 기능의 변경에 대해선 전례를 찾기 쉽지 않다.
통일부가 ‘개혁 대상’임을 수차례 강조하는 대통령과 대통령실 관계자들 언급들에는 대통령이 초법적 권한을 가진 듯한 시각이 묻어난다.
부처의 업무를 정파적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엿보인다.
통일부가 하는 교류 업무는 정부조직법상 명시된 통일부의 의무 중 하나일 뿐이다.
(정부조직법 31조 ‘통일부 장관은 통일 및 남북대화·교류·협력에 관한 정책의 수립, 통일교육, 그 밖에 통일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선악(善惡)’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북한인권 업무 역시 기본적으로 통일부 내 여러 부서 업무에 깔려있지만(통일부 인권인도실, 북한인권기록센터 등), 북한 인권 문제만을 특화해 전담토록 만들어진 조직 또는 주체는 외교부 북한인권대사와 북한인권재단 등이다.
 | 김영호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6월 3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남북회담본부 회담장에 마련된 인사청문 준비를 위한 후보자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과 약식 인터뷰를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뉴스1 |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대통령실 발 ‘통일부 역할변경론’ 관련, “통일부는 헌법기구고 분단국이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헌법기구이기 때문에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이 주요임무이고, 분단국이기 때문에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라고 했다.
안정적 상황관리와 평화통일 기반조성의 출발점으로서 ‘대화와 교류협력’이라는 임무가 형성된 역사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또 “1969년 창설 이후 한반도 전쟁 방지, 평화통일 기반 조성 등 역할과 성과를 폄하해선 안 된다”며 “미국 국무부도 미군 유해발굴, 송환 등을 하며 현금을 지원했는데 국무부도 ‘북한지원부’라고 폄하할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북한, 통전부 ‘패싱’하고 아태위는 ‘디스’
1일, 북한 발표에선 내용보다 형식이 더 눈에 띈 사건이 생겼다.
대남 메시지를 통일전선부가 아니라 외무성이 발표한 것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남편 정몽헌 전 회장 20주기에 방북하기 위해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와 접촉하겠다고 통일부에 신고했다.
통일부가 허가 여부를 발표하기도 전에, 민간 기업인이 방북을 추진하려 한다는 언론 보도만 난 상황에서 북한이 먼저 “남조선 그 어떤 인사의 방문도 검토해볼 의향도 없음을 명백히 밝힌다”고 선수치듯 입장을 밝혔다.
 | | 북한 평양에 위치한 외무성 전경. 주북러시아대사관 페이스북 캡처 |
그런데 이 입장은 ‘외무성 김성일 국장’ 명의로 나왔다.
게다가 담화는 “우리 국가에 입국하는 문제에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아무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고 깎아내렸다.
아태위는 통전부 산하에 설치된 노동당 외곽단체다.
형식상 민간 기구인 대외 조직이다.
남북 당국간 대화나 정치대화가 경색돼 있을 때도 민간 차원 접촉 기능을 가졌다는 명분이 있어 상대적으로 운신 폭이 넓다.
남북간 물밑 접촉이나 소통 창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비밀접촉 창구로 나선 적도 있다.
통일정보보털에선 “당국이 직접 나서서 하기 어려운 일을 민간 기구 모자를 쓰고 추진”했다고 설명한다.
아태위는 ‘디스’했지만, 외무성이 나선 것 자체에서 통전부는 아예 ‘패싱’된 셈이다.
◆남한을 적대 중인 ‘외국’ 취급
남북은 노태우 대통령 재임 때인 1991년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서로를 ‘나라와 나라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합의했다.
이 규정은 30년 넘게 남북관계와 양측이 사실상 각자 국가를 운영하는 현실적 토대가 됐다.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하에서 현실적으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대책이자 합의의 기초였다.
북한이 외무성 외에 통일전선부를 두는 형식을 취했고, 우리는 외교부 외에 통일부를 둬 대북업무를 다뤘다.
 |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왼쪽 세번째)이 2014년 금강산에서 원동연 아태 부위원장(왼쪽 두번째) 등 북측 관계자들과 기념식수 등 금강산관광 16주년 기념행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모습(위)과, 2009년 고 정몽헌 현대 회장 6주기 계기로 방북해 추도식에 참석한 모습(아래). 세계일보 자료사진 |
북한의 이번 발표는 공교롭게도 통일부가 장·차관을 모두 외교학과 및 외교관 출신으로 교체하는 발표가 나온 직후여서 우리 움직임에 북한이 따라하기 식으로 맞대응을 하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정대진 원주한라대교수는 “북한이 누차 밝힌 ‘정비례’ 대응 원칙이 군사분야뿐만 아니라 대남 외교에서도 반영된 특징이 보인다”며 “우리 정부가 국제관계 보편성에 입각해 대북정책을 전개하는 가운데, 북도 이번 방북 불허 방침을 외무성이 주도하는 모양새를 보여줬다”고 ?다.
남과 북이 서로 경쟁하듯 남북관계 특수성에 균열을 내는 시도는 한반도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우려가 나온다.
양무진 교수는 “북한이 이제 남북관계를 특수관계가 아닌 일반적 국가관계로 보겠다는 것으로, 남측 인사를 남북 특수관계에 따라 조평통, 아태위 등에서 처리하는 방식을 폐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어 “북한이 ‘투 코리아’ 경향성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적대 국가로 남측을 상대하겠다는 것”이라며 “현대그룹의 파트너인 아태위가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식물기구로 추락해있고, 통전부도 비슷한 처지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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