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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전제 법률분쟁 일괄 해결… 이혼기록 삭제 악용 가능성도 [대법 “이혼 후 혼인무효 가능”]

세계일보 기사제공: 2024-05-23 18:40:00

40년 만에 이혼판례 변경 의미
혼인무효·이혼은 법률적 실익 달라
무효 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가능
자녀 민법상 ‘혼인 외 출생자’ 판단
일상 가사채무 연대책임도 못 물어
법조계 안팎선 “합리적 판결” 환영
소송 남발 땐 ‘재판 지연’ 심화 우려

대법원이 대법관 전원 일치 의견의 전원합의체 선고로 “이미 이혼했더라도 혼인을 무효로 할 수 있다”고 기존 판례를 40년 만에 변경하면서 혼인 관계를 전제로 한 법률 분쟁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만 법조계 일각에선 단순히 혼인 기록을 지우고자 소송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면 악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3일 A씨가 전 배우자 B씨를 상대로 제기한 혼인 무효 확인 소송을 파기자판하며 이혼 신고를 마친 A씨에게 혼인 무효 확인의 이익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결을 내리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이미 이혼한 부부의 혼인도 무효로 할 수 있다고 판결하며, 40년 만에 기존 판례를 뒤집었다.
남정탁 기자

대법원은 구체적으로 “무효인 혼인과 이혼은 법적 효과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무효인 혼인은 처음부터 혼인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즉, 당사자들은 애초에 부부가 아니었던 상태가 된다.

이에 따라 혼인이 무효라면 민법상 인척간 혼인 금지와 형법상 친족상도례(친족 간 범죄는 형을 면제하거나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는 특례)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민법상 일상의 가사 관련 법률행위 채무에 대한 연대책임도 물을 수 없다.

반면 이혼의 효력은 장래에 대해서만 발생한다.
이혼한 뒤에도 이혼 전 혼인을 전제로 한 각종 법률관계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대법원은 특히 “무효인 혼인 전력이 잘못 기재된 가족관계등록부의 정정 요구를 위한 객관적 증빙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선 혼인 무효 확인의 소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A씨도 항소심 과정에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미혼모 가족을 위한 다양한 지원 사업의 혜택을 받지 못해 혼인 무효를 구할 확인의 이익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2심 재판부는 “A씨가 한부모가족 중 미혼모 가정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지원 요건과 필요성에 따라 혜택이 일부 달라질 가능성이 존재할 뿐, A씨의 구체적인 권리·의무에 직접적 변동을 초래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혼인 무효 판결이 확정되면 가족관계등록법에 따라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을 요구할 수 있다.
당사자들 사이에 출생한 자녀가 있으면 민법에 따라 ‘혼인 외의 출생자’가 된다.
자녀 양육 문제는 당사자들 간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당사자의 청구 또는 직권으로 법원이 정하게 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로 무효인 혼인 전력이 잘못 기재된 가족관계등록부 등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아 온 당사자의 실질적인 권리 구제가 가능하게 됐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이번 대법원 판례는 현재 진행 중인 혼인 무효 소송에도 바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법원 관계자는 “필수는 아니지만 (일선 법원에서) 대체로 대법원 판례를 존중해 판단을 내리기에 심리 중인 사건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확정 판결을 받았다면 다시 (혼인 무효를) 청구하기는 어렵다”면서 “재심을 통해서 다시 판단을 받아볼 수 있지만 대법원 판례 변경은 재심 청구 사유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전경. 뉴시스

이날 40년 만의 판례 변경에 대해 법조계 안팎에선 “합리적 판결”이라며 환영 반응과 함께 남용 우려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문혜정 법률사무소 정 변호사는 “이혼과 달리 혼인 무효일 경우, 혼인으로 인해 발생한 일상 가사 채무를 지지 않아도 되는 등의 법률적 실익이 있다”며 “혼인할 의사가 없는데 혼인이 돼 버렸다면 ‘이혼했으니까 헤어지는 건 똑같지 않으냐’는 게 아니라, (혼인 무효로) 되돌리고 싶을 텐데 합리적 판결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승우 법무법인 정향 변호사는 “기존에는 하루라도 빨리 혼인 관계를 해소하고 싶은 사람들이 요건이 까다로운 무효 소송 대신 울며 겨자 먹기로 이혼소송을 택하는 경우가 있었다”면서 “이번 판결로 인해 일단 이혼하고 나서 차분히 무효 소송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단순히 혼인 기록을 지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단히 무효 소송을 하는 경우도 생겨날 수 있어 가사사건 전반의 업무량이 늘어 사건이 지체될 우려도 있다”고 내다봤다.

한편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혼인이 무효가 된다면 (A씨가) 미혼모 지원을 받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이미 한부모가족지원법을 통해 미혼모 지원이 이뤄지고 있어 이미 이혼한 사람이 혼인 무효로 한부모가 아닌 미혼모로 인정받더라도 실질적으로 지원의 차이가 크지 않을 것 같다”고 언급했다.
박진영·유경민·이종민·윤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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