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처리하기 위해 '의회 패싱'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야당은 즉각 정부 불신임안을 발의한다는 계획이다. 정국이 혼돈으로 빠져들자 프랑스 금융 시장은 출렁였다.
미셸 바르니에 총리는 2일(현지시간) 오후 사회보장 재정 법안의 심사가 열리는 하원에 전격 출석해 "정부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며 헌법 조항을 발동해 사회보장 재정 법안을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 헌법 제49조3항은 정부가 긴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때 국무회의 승인을 받은 법안은 총리의 책임 아래 의회 투표 없이 통과시킬 수 있게 한다.
바르니에 총리는 "프랑스 국민은 국가의 미래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우리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것이 제가 헌법 49조3항에 근거해 법안 전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책임을 직시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에 도달했다"며 "저도 책임을 직시하겠다"고 덧붙였다.
바르니에 정부는 앞서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6.1%로 예상되는 재정 적자를 내년 5%까지 낮추기 위해 정부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인상하는 내년 예산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하원 내 주요 정치 세력인 좌파 연합과 극우 진영은 소비자 구매력 감소나 사회적 불평등 심화, 기업 부담 증가 등을 이유로 정부 예산안을 반대해 왔다.
바르니에 총리는 이날 오전까지 애초 예산안에서 한발 양보해 일부 증세안과 사회보장 축소 계획을 철회했다. 그런데도 극우 국민연합이 추가 요구사항을 관철하려 들자, 더 이상 타협은 없다는 취지로 헌법 조항을 발동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야권은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발의하겠다고 경고했다. 극좌 정당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마틸드 파노 원내대표는 "바르니에 총리는 가장 짧은 임기를 가진 총리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민연합의 실질적 지도자인 마린 르펜 하원 원내대표는 다른 정치 진영이 불신임안을 발의하더라도 이에 찬성표를 던질 뜻을 밝혔다.
불신임안은 무난히 가결될 것으로 보인다. 불신임안은 하원 재적의원의 과반수 찬성이 있으면 가결된다. 하원 전체 재적 의원은 577명이지만 현재 2자리가 공석이라 가결 정족수는 288명이다. 현재 하원 구성상 좌파 연합과 국민연합 및 동조 세력 의석수를 합하면 300석이 훌쩍 넘는다. 불신임안이 통과되면 바르니에 정부는 즉각 총사퇴해야 한다. 프랑스 제5공화국 이래 정부가 의회의 불신임을 받아 해산한 경우는 1962년 조르주 퐁피두 총리 때가 마지막이다.
이날 프랑스 정부가 붕괴 위기에 처하자 프랑스 외환시장에서 유로화 환율은 1유로당 1.0470달러로 전 거래일보다 1.01% 급락했으며 파운드화 대비로도 1유로당 0.8287파운드로 0.21%까지 떨어졌다. 프랑스 증시 대표지수인 CAC40도 정부 붕괴 가능성에 이날 장 초반 전 거래일 대비 1.2%까지 하락했다.
프랑스 국채에 대한 투자 심리도 압박받아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2.923%까지 올랐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10년 만기 국채 스프레드(금리 차)도 8bp 증가한 88bp를 기록했다. '유로존 최대 경제 대국' 독일과 주변 국가들의 채권 금리 차는 경제 불균형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로 활용된다. 전문가들은 정부 불신임이 현실화해 내각이 총사퇴할 경우 국제 금융 시장에서 프랑스의 신뢰 하락으로 이어져 신용등급 하락, 국채 금리 상승, 외국인 투자 감소와 같은 경제 문제들이 뒤따를 것으로 우려한다.
앙투안 아르망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에서 "이 중요한 시기에 당파를 초월해 국익을 위해 모든 사람이 각자의 책임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며 정부의 발목을 잡는 정치권에 협조를 촉구했다.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