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전략 산업들이 글로벌 산업 전쟁에서 뒤처질 위기다. 12·3 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 후폭풍 등 정치적 혼란 속 산업 지원 정책들이 올스톱되면서 자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글로벌 기업들과의 격차가 더 벌어질 모양새다. 특히 반도체 업계는 주 52시간 근무 예외 조항을 담은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에 대한 관심이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속이 타들어간다고 토로한다. 해당 법안은 처리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 연구개발(R&D) 종사자에 대해 주 52시간 근로 규제를 완화하고, 반도체 기업에 대한 직접 보조금 지원 근거를 마련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법이 통과돼야 첨단 반도체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은 주 52시간제에 갇혀 있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비상계엄 사태로 상임위가 마비된 상태여서 사실상 연내 처리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법안들도 흐지부지되는 형국이다. 앞서 여야는 반도체 기업의 통합투자세액 공제율을 현재보다 5%포인트 올리는 것에 대해 잠정 합의했으나, 최근 통과된 예산안 부수 법안에는 이런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 또 정부는 지난달 말 반도체 생태계 지원 강화방안을 발표하면서 약 3조원에 달하는 용인·평택 반도체 클러스터의 송전선로 지중화 사업에 대해 비용을 분담하겠다고 했고,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기반시설 지원 한도를 현행 단지별 500억원에서 상향하겠다고 했으나 해당 지원도 현재로서는 안개 속이다. 해외 기업들이 자국 정부로부터 천문학적인 지원을 받고있는 사이, 우리나라 기업들은 그야말로 손발이 묶여 있는 상황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라피더스에 내년에만 2000억엔(약 1조7900억원)을 추가 투자한다. 2030년까지 라피더스를 포함한 반도체·인공지능(AI) 분야에 10조엔(약 93조5330억원) 이상의 공적 지원을 하는 종합경제대책을 발표했다. 중국은 역대 최대 규모인 64조원의 반도체 투자기금 ‘빅펀드’를 조성했다.
산업계는 정부와 연합을 이뤄 글로벌 협상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이때, 고군분투하고 있다. 특히 미국 투자를 확정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우 미국 정부와 막바지 보조금 협상에 속도를 내야하는데 한국 정부는 물론 정치권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트럼프 2기의 관세 리스크와 보조금 축소 등에 대한 정부와 기업 간 대책 논의 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기업도 우려되지만 정부가 반도체 생태계 구축을 위해 지원해 온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와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의 피해도 걱정이다. 대외 국가신용도는 낮아지면서 이러한 영향은 고스란히 자금력이 약한 반도체 업계의 중소·벤처기업에 타격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항전인 ‘반도체 전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정치 불안이라는 이유로 국가 경제와 기업 경쟁력이 약화되면 되겠는가. 정부는 주 52시간 근로 규제 완화, 세제 혜택 증가 등으로 기술력 증진을 위한 환경만큼은 조속히 마련해줘야 한다. ‘골든타임’을 놓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잇단 경고를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