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에서 상장폐지되는 기업이 11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증권 당국과 주주들의 기업 가치 제고 압박에서 벗어나 사업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상장사들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올해 도쿄증권거래소에서 상장폐지되는 기업이 전년 대비 54% 늘어난 94곳으로 2013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고 15일 보도했다. 이에 따라 올해 신규 상장 및 상장폐지를 제외한 도쿄증시 상장사 수는 전년보다 1개 줄어든 3842곳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도쿄증시 상장사 수가 감소하는 것은 도쿄증권거래소가 오사카증권거래소와 합병한 2013년 이후 처음이다.
닛케이는 "도쿄증권거래소와 투자자들의 기업 가치 상승 요구가 커지고 있다"며 "많은 기업이 경영 자유를 위해 스스로 시장에서 나가거나 다른 기업 및 투자펀드에 인수되는 방식으로 상장폐지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행동주의 펀드를 비롯한 투자자들의 주주 환원 압박에서 벗어나 자율성이 담보된 중장기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MBO(경영자 매수) 방식으로 상장폐지를 선택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현지 인수합병(M&A) 정보 업체 레코프에 따르면 지난해 상장폐지를 위해 진행된 MBO 규모는 주식 매입액 기준 1조엔을 돌파하며 종전 최고기록이었던 2020년의 3050억엔을 넘어섰다.
기업이 MBO 방식으로 상장폐지되면 자금 조달 수단이 제한되고 회사의 인지도와 신뢰도가 하락할 위험이 있지만, 소수의 주주에게 회사 지배력이 집중돼 경영진의 의사 결정이 빨라지는 장점이 있다. 최근 역대 일본 기업 MBO로는 사상 최대 규모인 7100억엔의 주식공개매수를 통해 상장폐지한 대형 제약회사 다이쇼 제약의 오너 일가는 "증시 상장이 선행 투자 및 근본적인 구조조정과 같은 회사의 중장기 대책을 실행하는 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닛케이는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일본 상장 기업 수가 연평균 40곳 이상 증가했는데, 이것이 너무 많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며 "이 같은 상장폐지로 기업들이 주가를 갱신할 수 있다면 전 세계에서 투자금을 유치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세계거래소연맹(WFE)에 따르면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도 상장 기업 수가 10~20년 새 절반 가까이 감축되는 등 기업들이 상장을 통한 자금 조달에만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 확인되고 있다.
2025년에도 도쿄증시의 상장폐지 흐름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도쿄증권거래소는 PBR(주가순자산비율)이 1배 이하인 기업에 개선을 요구하고 있고 주주들의 환원 요구도 확대되는 등 상장유지 비용이 계속해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 내년 3월 이후엔 도쿄증시 내 성장주들의 상장 유지기준을 상향해 주가가 부진한 기업의 퇴출을 유도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닛케이는 "상장사 수가 줄어든다고 해서 당장 성장주들이 나타나진 않을 것"이라며 "일본엔 미국의 ‘매그니피센트7’과 같은 첨단기술 기업이 부족하다. 성장 기업을 어떻게 육성할 것인지가 문제"라고 강조했다. 가즈노리 다케베 골드만삭스 일본 주식 전략가는 "시장에 남기로 선택한 기업들은 상장 비용을 초과하는 성장을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김진영 기자 camp@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