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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등장 40주년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소련(현 러시아)의 초대이자 마지막 대통령을 지낸 미하일 고르바초프(1931∼2022)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면전이 발발한 지 6개월 만에 숨을 거뒀다.
향년 91세였으니 ‘그 정도면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비롯한 비통함이 사망을 앞당겼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고르바초프 생전에 통역관으로 오래 일한 한 측근은 2022년 9월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지난 몇 년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가 격변한데 이어 ‘특별군사작전’에 충격과 혼란을 느낀 것이 명백했다”고 말했다.
특별군사작전이란 러시아 관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컫는 말이다.
소련(현 러시아)의 초대이자 마지막 대통령을 지낸 미하일 고르바초프. 사진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1987년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2022년 2월24일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간 지 이틀 만에 발표한 성명에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해 “우크라이나 군사 작전을 중단하고 평화 협상을 즉각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소련 해체의 결과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가 서방과 너무 가까워져선 안 된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2015년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의 대결이 전쟁으로 이어져 핵무기 사용마저 부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는 푸틴의 사고와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르바초프의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
1999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라이사 고르바초바 여사도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물론 당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별개 국가가 아니고 둘 다 소련의 일부이던 시절이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부부가 돼 가정을 일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도 고르바초프가 마음 속으로 우크라이나를 각별히 여긴 것만은 분명하다.
푸틴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한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2022년 8월 고르바초프가 별세한 직후 푸틴은 시신이 안치된 병원을 찾아가 조의를 표하긴 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전직 대통령임에도 그 장례는 국장(國?)으로 치러지지 않았다.
푸틴은 장례식에 불참하는 것으로 고인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2004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정계 원로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함께한 모습. 당시 푸틴은 52세, 고르바초프는 73세였다.
게티이미지 제공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인 1985년 3월11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공산당 서기장에 등극했다.
이는 전임자인 콘스탄틴 체르넨코(1911∼1985)가 지병으로 사망하고 불과 하루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54세의 젊은 지도자 탄생을 두고 외신은 “크레믈궁 사상 처음으로 정권이 보수 노장파에서 소장파로 넘어갔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집권 후 개혁과 개방의 기치 아래 소련을 변화시켰다.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긴장 완화를 통해 냉전 종식을 이끌었다.
덕분에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는 개인적 영예를 누렸으나 소련은 해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탈(脫)냉전의 기쁨도 잠시, 세계는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일으킨 끔찍한 전쟁을 통해 냉전 때보다 더한 야만의 시대로 퇴보했음을 목도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등장 40주년을 맞는 소회가 그저 착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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