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 후 14연승은 거짓말처럼, 신기루 같이 사라졌다.
어느덧 패배가 두 개나 쌓였다.
외국인 선수 투트쿠는 당분간 돌아올 수 없다.
괜찮은 대체 외인을 구하는 작업도 쉽지 않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역대 최다연승 신기록을 꿈꾸며 독주 체제를 갖췄던 것 같은데, 불과 2경기만에 위기를 걱정해야 되는 처지에 몰렸다.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 얘기다.
흥국생명은 지난 10월19일, 2023~2024시즌 챔프전에서 3전 전패의 아픔을 안겼던 ‘디펜딩 챔피언’ 현대건설과 2024~2025 V리그 개막전을 치렀다.
결과는 3-1 승리. 이날 승리를 시작으로 승승장구하며 14경기를 내리 이겼다.
‘배구여제’ 김연경은 나이를 잊고 매 경기 공수에서 맹활약해줬고, 트라이아웃 마지막 순번으로 뽑은 투트쿠 부르주(튀르키예)도 우려를 딛고 공격과 블로킹에서 쏠쏠한 기량을 뽐냈다.
김연경의 새 아웃사이드 히터 파트너 정윤주도, 새로 이적해와 주전 세터와 리베로를 꿰찬 이고은과 신연경도 제 몫을 다 해냈다.
김수지, 아닐리스 피치(뉴질랜드)가 지키는 코트 가운데도 든든했다.
주전 모두가 정밀한 톱니바퀴처럼 잘 굴러가면서 코트에만 서면 이겼다.
주전과 백업의 기량 격차가 큰 것도 연승 행진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여자부 역대 최다연승 타이기록(15연승)이 걸렸던 지난 17일 정관장전. 세트 스코어 1-3으로 패했다.
더 뼈아픈 것은 투트쿠가 4세트 막판 무릎 부상을 호소하며 코트를 떠났다.
연승행진이 깨지고, 이틀이 지난 20일. 수원 원정에서 현대건설을 만났다.
정관장을 이겼다면 2021~2022, 2022~2023시즌에 15연승 기록을 두 차례 작성한 현대건설을 상대로 여자부 역대 최다연승 신기록에 도전할 수 있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연승행진이 깨진데다 김연경의 공격부담을 덜어주고 동 포지션 최강의 사이드 블로킹 능력을 뽐내던 투트쿠가 빠진 상황에서 ‘난적’ 현대건설을 만난 것은 불운이었다.
그간의 불안요소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1,2,3세트 모두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완패하며 세트 스코어 0-3으로 경기를 내줬다.
14연승 뒤에 찾아온 흥국생명의 첫 연패다.
제 아무리 ‘배구여제’라도 해도, 김연경도 사람이었다.
1세트 팀 리시브 효율이 4.55%로 수없이 많은 오픈 공격이 강요됐다.
오픈 공격 성공률 1위인 김연경도 흔들렸다.
1세트 오픈 공격 성공률은 12.5%(1/8). 김연경의 1세트 전체 공격 성공률은 16.67%. 효율은 ?8.33%까지 곤두박질쳤다.
흥국생명의 마지막 보루인 김연경의 이날 최종 성적표는 6득점, 공격 성공률 25%. 최소득점, 최저 공격 성공률이었다.
김연경의 이날 경기 전까지 올 시즌 최소득점은 지난 1일 페퍼저축은행전의 13득점, 최저 공격 성공률은 지난달 7일 도로공사전의 38.10%였다.
자신의 평균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성적을 낸 김연경이다.
투트쿠가 빠진 아포짓 자리는 백약이 무효였다.
김다은, 최은지에 최근 GS칼텍스와의 트레이드로 합류한 문지윤을 투입해봤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최은지를 아웃사이드 히터로 돌리고 정윤주를 아포짓으로 활용해봤지만, 이 전술 역시 썩 좋지 않았다.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도 경기 뒤 “오늘 경기는 배구에 대해 논할 게 없다”라고 짧게 총평을 남길 정도의 완패였다.
이어 “외국인 아포짓이 없다는 게 변명이 되진 않는다.
경기는 질 수 있지만, 이런 태도나 이런 경기력으로 지면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연승 후유증이라고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 아본단자 감독은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오늘 경기에 평소 경기에 많이 뛰지 않던 선수들이 코트 위에 오래 있었다.
그들이 왜 평소에 코트를 잘 밟을 수 없는지를 알 수 있는 경기였다”라며 혹평했다.
문제는 투트쿠는 정확한 진단이 나와 봐야겠지만, 최소 4주에서 길면 6주 정도를 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흥국생명 프런트는 이미 대체 외인 물색 작업에 들어갔지만, 트라이아웃 참가자 내에서 대체 선수를 찾아야 하다 보니 마땅한 선수를 찾기는 쉽지 않다.
지난 시즌 대체 외인으로 영입했던 윌로우 존슨은 “미국에서의 생활을 만족한다”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몇몇 선수로 추려서 컨택 중이지만, 영입을 확정해도 메디컬 테스트에 비자 발급까지 하세월이다.
당분간은 현대건설전을 뛴 선수들로 다른 팀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얘기다.
문득 떠오르는 팀이 있다.
2022~2023시즌 현대건설은 개막 15연승을 달렸다.
그러나 야스민이 13경기만 치르고 부상으로 낙마했다.
야스민의 자리를 토종 아포짓 황연주로 메우며 야스민을 기다렸지만, 야스민은 결국 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부랴부랴 외인을 수소문해 이보네 몬타뇨를 데려왔지만, 야스민을 대체하기엔 기량미달이었다.
야스민 없이 오랜 시간을 버티던 현대건설은 토종 선수들의 체력이 바닥났고, 결국 가장 오랜 기간 1위를 지켰음에도 흥국생명에게 정규리그 1위 자리를 내주고 2위로 내려앉았다.
선수들의 상실감은 컸고, 플레이오프에서 도로공사에 2전 전패로 패퇴하고 말았다.
과연 흥국생명은 2년 전 현대건설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며 시즌 시작부터 지켜온 선두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흥국생명의 향후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수원=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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