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잉간이 나랑 한 달을 넘게 살아보고도 아직 나를 간단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이미 주인에게 나의 위대함을 여러 번 보여 줬음에도 믿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 또 나를 얍잡아 보고 나에게 목욕값, 아니 모욕감을 줬기 때문이다.
주인은 건방지게 나를 이렇게 이상하게 생긴 통에 담았다. 그리고 한참을 둘러보며 사진을 막 찍어댔다. 난 깊은 모멸감과 목욕값, 아니, 모욕감을 참으며 가만히 지켜봤다. 주인이 무슨 짓까지 하는지 보려던 심산이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뭔가 재활용한 통이다. 그래서 더 기분 나쁘다. 테두리에 막 은박지를 뜯은 것 같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으니 주인도 이걸 부정하진 못할 거다.
그렇게 한참 동안 사진을 찍고 날 관찰하더니, 나를 풀어줬다. 그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노트북 앞으로 가서 글을 끄적끄적 하고 있다. 나를 실험 대상으로 삼다니, 이거이거 도치로서 참 기분 나쁘다.
뭣보다 나를 통에 담아서 알고자 했던 게 뭔지 알 수 없어서 더 기분 나쁘다. 대화가 통하는 것도 아니니 답답할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내가 스스로 해결하기로 했다. 지금부터 여러 정황 근거들을 모아모아 예리하고 날카로운 추리를 시작하겠다.
도대체 주인은 왜 나를 (재활용) 빨간 통에 담았는가?!
추 리 시 작~
가설 1. 고슴도치 전용 배를 만들어 보려 했다.
가장 무게를 두고 있는 가설이다. 그래서 맨 처음으로 주장해본다. 주인은 저 배를 고슴도치 전용 배로 만들어보려 했고, 우선 육지에서 나를 태워 본거다. 내가 탔을 때 어느 정도 공간이 남는지, 돗대는 어느 위치에 달아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 나를 직접 태워 본 거다.
어쩐지 주인이 요즘 바다에 가고 싶다느니, 시원한 바람이라느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었다. 주인은 바다로 여행갈 준비를 하면서, 기특하게도 나와 함께 가기 위해 내 전용 배를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진실의 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지고 있다. 소오름~
그런데 이 가설의 결정적인 맹점은 주인에게 바다에 놀러 갈 만 한 돈이 없다는 거다. 거의 절대 빈곤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주인이 갑자기 로또를 맞지 않는 한 바다에 놀러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로또를 살 돈이 있을 런지도 의심이 된다.
무튼, 이 가설은 정황 근거 상 가능성이 높고, 내가 바라는 것이고, 또 내가 바라던 바고, 난 그랬으면 좋겠고, 뭐 등등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다.
가설 2. 색깔 구분 테스트였다.
주인이 얼마 전부터 내 눈앞에 물건을 가까이 대고, 멀리 가져가고, 또 가까이 대고 하는 이상한 행동을 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내 시력을 알아보고 싶었던 것 같다.고슴도치의 시력에 대해서는 언젠가 특집으로 한 번 다뤄야 하겠지만, 우린 시력이 엄청나게 낮다. 주인이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낮다고 보면 되겠다. 그렇다고 세상 돌아가는 걸 암것도 모르는 건 아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먼 곳을 보고 있다.
시력이 낮은 대신 청각과 후각이 뛰어나게 발달했으니, 주인이 내 눈앞에서 물건을 대었다 때었다 하는 짓은 바보짓에 가깝다. 눈 감고 있어도 어디쯤 와 있는지 다 안다.
여튼 멍청한 주인은 내가 시력이 나쁘니 색깔도 구분 못할까 싶어 테스트를 해보려 했던 거다. 그래서 일단 빨간통을 준비했는데, 막상 나를 넣어놓고 보니, 어떻게 테스트를 해봐야 할지 감을 못 잡은 게다. 이거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주인 정도의 지능이라면 이 가설도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할 수 있겠다.
근데 살짝만 알려주자면, 도치도 그 정도 색 구분은 가능하다. 근거는 어느 위대한 실험에서 우리도 색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위대한 실험은 조만간 소개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 정도만 하고 넘어 가겠다.
가설 3. 집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끝으로 저 해괴망칙한 빨간 통을 내 집으로 사용하려 했다는 가설이다.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난 포치가 두 가지 밖에 없다. 사과처럼 생긴거랑 하트무늬 포치. 다른 도치 주인들은 무지개빛으로 막 포치를 7개, 8개 씩 형형색색으로 가지고 있어서 돌려쓰던데, 주인은 돈이 없어서 포치를 두 개 밖에 못 샀다.
내 포치들. 둘다 내 st는 아니다. 유치해. 그래서 주인은 포치를 자주 빨아줘야 하는데, 이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닌지라... 지친 듯 하다. 어쩐지 얼마 전에 손빨래 하기 좋은 세재를 막 찾아보더라. 조만간 이 상품도 구입할 것 같던데. 암튼 주인은 포치 대용으로 쓸만한 통을 찾아서 가져온 것이고, 그게 이 빨간통인 거다. 일단 내가 들어가는 지 함 넣어 본거고.
이거 참 기분 나쁘면서도 애잔하다. 아이고, 주인놈아. 그깟 포치 얼마나 한다고... 혹시 이 가설이 맞다고 한다면, 제발 주인이 포치를 살 시간이 없어서 '임시방편'으로 그 생각을 했기를 빈다.
아,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은 추리들이다. 코난이 왔어도 이보다 더 디테일하게 추리할 순 없었을 거다. 도대체 주인놈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셋 중 하나일 것이다.
두고 보자. 주인놈이 저 빨간통으로 무슨 짓을 하는지 두고 보면 내 추리가 완벽하게 옳았음이 곧 드러날 것이다. 주인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내 손바닥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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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근
요즘 부쩍 많이 자라서 조금 무섭고.. 낯설고.. 무튼 그런 코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