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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IT 인프라에 관련된 업체들의 움직임을 보면 ‘주류’ 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몇 가지 흐름을 짚어낼 수 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움직임은 ‘솔루션의 공급’ 인데, 인프라 전체를 구성하고 높은 효율을 가지는 환경을 손쉽게 도입할 수 있다는 장점은 시간과 비용 모두를 절감할 수 있게 해 주는 만큼, 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부분이다.
이런 ‘솔루션’을 만드는 방법 또한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여러 전문 장비 업체들간의 협업이 있는데, 표준 규격에 기반한 기술과 상호간의 인증 프로그램을 통해 공동의 패키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의 회사가 인프라의 모든 부분을 조율한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인데, 이는 다양한 장점이 있지만 해 낼 수 있는 업체 자체가 드물다.
HP의 이미지는 ‘컴퓨팅’과 ‘이미징’ 에 특화된 느낌이 강하다. 이는 HP의 서버와 PC 시스템, 그리고 프린터가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의 HP는 명실상부한 ‘종합 컴퓨팅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으며, 최근 3COM 인수를 완료하면서 네트워크를 포함한 인프라 전반에 대한 역량을 크게 끌어올렸다.
■ 네트워크 산업의 역사 '3COM'
최근 HP는 네트워크 사업의 강화를 위해 3COM의 인수를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업계에 상당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는데, 이는 3COM이 네트워크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가 각별하기 때문이다. 3COM은 컴퓨터 네트워크의 초기에 현재 사용하는 ‘이더넷(Ethernet)’ 규격의 보급에 큰 역할을 했는데, 이는 창립자 중 하나인 로버트 맷칼프(Robert Metcalfe)가 이더넷 규격을 고안해 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3COM은 ‘Computers, Communication and Compatibility’ 를 줄인 것으로, 1979년 4명의 엔지니어가 공동 설립했다. 주력 사업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포함하는 ‘네트워크 솔루션’ 에 집중되었으며, 1980년에는 유닉스(UNIX)를 위한 첫 상업적 TCP/IP 소프트웨어 UNET을, 1981년에는 첫 이더넷 트랜시버 3C100을, 1982년에는 첫 이더넷 어댑터를 출시하게 된다. 당시 성공적이었던 솔루션으로는 10BASE-T 카드인 3C501이 꼽힌다.
1987년에는 마켓 포지셔닝 강화를 위해 브릿지 커뮤니케이션즈(Bridge Communications)를 인수한다. 이 회사는 1981년 설립되어 네트워크 브릿지와 라우터, 커뮤니케이션 서버를 만들던 회사로, 첫 상업 목적 라우터를 만든 회사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인수 이후 3COM은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에서 선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 3COM은 ‘닷컴 붐’을 타고 빠른 성장을 기록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3COM은 ‘뉴 르네상스 플랜(New Renaissance Plan)’을 내세우며, 다양한 제조사의 네트워크들과 상호 운용이 가능한 표준 기반의 솔루션을 표방하게 된다. 이 시기에 3COM이 선보인 개념으로는 스택 가능한(Stackable) 허브와 스위치 제품군, 그리고 PoE(Power over Ethernet) 기술이 있다.
또한 3COM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건으로는 1997년 U.S. 로보틱스(U.S. Robotics)의 인수가 있다. 이 회사는 예전 인터넷 초창기 전화 접속 모뎀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친숙할 만한 회사로, 이 회사의 x2 기술은 당시 락웰(Rockwell, 현재 해당 부서는 Conexant로 독립)의 K56Flex 와 56Kbps 모뎀 시장을 양분하기도 했다. 당시 3COM은 U.S. 로보틱스를 인수함으로써 단숨에 시장 선도적인 모뎀 제조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97년 3COM은 흥미로운 기술인 이더넷 오버 DSL(Ethernet over DSL) 과 멀티패스 트렁킹(Multipath Trunking) 기술 등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1998년에는 NBX를 인수한 뒤 IP 기반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완전한 IP PBX 시스템을 처음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3COM은 VoIP 기술의 개선을 위해 벨 연구소와의 협력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NIC(Network Interface Card) 시장에서 3COM은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수익성이 가장 높다는 서버용 NIC 시장에서 당시 3COM의 위치는 인텔에 이은 2위였다. 하지만 3COM은 이 시장에 큰 의욕을 보이지 않았는데, 기가비트 지원 NIC로 시장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3COM은 기가비트 지원 이더넷 카드 개발을 폐기한다. 이후 브로드컴과의 조인트 벤처를 통해 3COM 브랜드의 카드가 나오기도 했었지만, 직접 개발은 아니다.
▲ 3COM의 세 가지 브랜드는 각자 분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3COM에도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로는 비즈니스의 방향과 수익 모델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PC 플랫폼과 네트워크 환경의 변화가 있었는데, 주 수익원이었던 NIC 시장이 크게 줄어든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부터 시스템들이 메인보드의 칩셋에 NIC 기능을 내장하기 시작했으며, 별도의 NIC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덕분에 3COM은 이 시기 큰 폭의 사업과 조직 정리를 단행하게 된다.
21세기 들어 3COM은 두 건의 큰 전략적 인수를 진행했다. 먼저 2003년에는 중국 화웨이(Huawei)와 조인트 벤처 형태로 H3C 브랜드를 선보이게 된다. H3C는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엔터프라이즈 제품군을 맡았다. 이후 H3C는 3COM이 화웨이의 지분을 인수하여 완전한 3COM 산하의 자회사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3COM은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의 네트워크 보안 솔루션을 강화하기 위해 2005년 티핑포인트(TippingPoint)의 인수를 진행했다. 티핑포인트는 침입탐지시스템(IPS: intrusion prevention system) 장비를 주로 취급하였으며, 업계 최초의 디지털 백신을 만들어 내기도 했었고 미국 내 대형기업 상당수를 고객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 두 건의 인수를 통해 3COM은 세 개의 브랜드를 아우르는 포트폴리오를 가지게 되었는데, H3C의 엔터프라이즈 제품군과 티핑포인트 브랜드의 보안 제품군, 그리고 3COM 브랜드는 미드레인지 이하의 엔터프라이즈 시장을 맡았다. 또한 독특한 점이라면 인수 후에도 기존의 브랜드를 그대로 가져갔다는 것인데, 이는 기존의 브랜드가 가진 가치가 충분히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 HP 엔터프라이즈 전략의 총아 ‘프로커브’
엔터프라이즈 컴퓨팅 시장에서 네트워크의 존재를 빼 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예전의 메인프레임-터미널 형태의 인프라도, 최근의 서버-클라이언트 형태의 인프라도 모두 네트워크를 통한 시스템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네트워크에 연결된 컴퓨터는 단순한 계산기를 넘어서서 훌륭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HP 또한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고, 30여년 이상 네트워크 관련 사업 부서를 운영하고 있다. HP는 1972년 미니 컴퓨터를 위한 네트워크 솔루션을 선보였으며, 1979년에는 TCP/IP 기반 인트라넷을 처음 선보였던 바 있다. 처음 HP가 네트워크 관련 사업부를 만든 것은 1979년으로 전해지는데, 이 때는 데이터 시스템 사업부(DSD: Data Systems Divisions)에 속한 부서로 처음 출발했다고 한다.
이후 이 부서는 로즈빌 네트워크 사업부(RND: Roseville Networks Division), 워크그룹 네트워크 사업부(WND: Workgroup Networking Division)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며 1990년대 후반에 이르게 되었다. 20세기까지 네트워크 부분에서 HP는 1985년 최초로 10Base-T를 선보였으며, 1990년에는 최초의 네트워크 프린터를 선보였던 바 있다.
▲ ‘프로커브’ 브랜드는 HP 네트워크 사업 역사에서 매우 의미 깊은 전환기였다.
프로커브(ProCurve) 브랜드는 1990년 후반 HP가 네트워크 사업부를 독립 사업부로 분리하고자 하면서 나온 것이다. HP는 이 네트워크 사업부가 독립적인 네트워크 솔루션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의, 업계에서 하나의 네트워크 업체로 인정받는 수준으로 자리잡길 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제품 전체를 아우르는 ‘브랜드’ 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프로커브 브랜드는 1998년 처음 등장했다. 독립 부서로 존재할 네트워크 사업부와 제품을 상징할 새 브랜드의 최종 후보는 두 가지, ‘프로커브(ProCurve)’와 ‘프로스케일(ProScale)’이 남았는데,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은 ‘프로커브’ 였다. 이름의 선정 이유로는 이름을 구성하는 각 단어들의 뜻과, 단어의 대중성이란 측면이 고려되었다고 전해진다.
프로커브 브랜드의 네트워크 사업부는 독립적인 부서 형태로 운영되었지만, 여전히 HP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고 있었던 만큼 이로 인한 효과도 있었다. HP라는 대형 브랜드가 주는 안정감이라는 이미지는 대부분의 네트워크 관련 브랜드와는 그 수준이 다르다. 또한 단품이 아니라 ‘인프라’ 차원을 고려할 때도 HP라는 모 브랜드는 그 효율의 보증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었다.
▲ ‘프로커브 원’은 이제 ‘얼라이언스 원’ 으로 통합되어 운영된다.
프로커브 제품군은 네트워크 스위치, 라우터, 모바일 액세스 포인트, 관리 소프트웨어와 보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또한 프로커브 브랜드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라이프타임 워런티’ 나 자체 ASIC를 사용하여 제품의 성능 및 확장성, 안정성 이슈에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장점으로 꼽혔다.
또한 HP는 2008년 8월, 무선랜 분야의 전문업체인 콜루브리스 네트웍스((Colubris Networks)의 인수를 발표했다. 콜루브리스 네트웍스는 2000년 창립 이후 ‘분산 구조’ 기술을 앞세워 무선 네트워크 시장에서 저변을 넓혀 왔던 바 있다. HP는 콜루브리스 네트웍스의 포트폴리오를 자사의 프로커브 안에 통합해 유, 무선을 아우르는 통합 솔루션을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 흥미로운 움직임으로 ‘HP 프로커브 원(ONE:Open Network Ecosystem)’ 제휴 프로그램이 있었다. 2009년 초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자사의 제품 외에도, 업계 선두의 개방적이고 표준에 근거한 솔루션파트너들과 함께 통합된 네트워크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HP는 파트너들의 솔루션을 프로커브 시스탬 내 모듈 또는 어플라이언스 형태로 함께 다루었다.
전 세계 네트워크 스위치 시장에서 HP는 시스코(Cisco)에 이어 2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프로커브 원 프로그램을 통해 강력한 포트폴리오를 확보했으며, 시스코의 대안이라는 측면에서는 훌륭한 선택이기도 하다. 여기에 HP가 가진 네트워크 이외의 포트폴리오는 전체 인프라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서로에 시너지 효과를 주기도 했다.
■ ‘시스코 프리 데이터센터’ 마지막 퍼즐 맞춰지다
HP는 3COM의 인수가 완전히 마무리됨에 따라, HP가 가지고 있던 프로커브, 3COM이 가지고 있던 H3C, 티핑포인트, 3COM 브랜드를 HP의 포트폴리오에 모두 포함시키고 재정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또한 이와 함께 조직 개편도 실시해서, 기존의 엔터프라이즈 서버, 스토리지 (ESS) 그룹과 네트워크를 묶은 엔터프라이즈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ESSN) 그룹을 만들어 냈다.
HP는 3COM의 인수를 통해 네트워크 시장에서의 확고한 2위 자리를 굳혔다. 2010년 4월 발표된 가트너의 자료에 의하면, HP는 3COM을 인수하면서 시스코에 이은 시장 점유율 37.5%의 2위 업체로 자리매김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3위 이하의 그룹과 큰 격차를 보이면서 양대 구도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이제 ‘시스코 프리 데이터센터’ 구축이 현실로 다가왔다.
HP의 네트워크 포트폴리오는 솔루션에서 제품, 서비스에 이르는 ‘엔드 투 엔드’ 라인업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HP는 총 네 개 브랜드의 제품을 크게 네 가지 제품군으로 재배치했는데, H3C가 가지고 있던 고성능 엔터프라이즈 제품군은 A, 기존 프로커브 제품군은 E, 3COM의 엔트리급 제품군은 V로 정의되며, 티핑포인트의 보안 솔루션은 S 제품군이 되었다. 그리고 각 브랜드는 HP로 통합되지만, 티핑포인트는 기존 브랜드를 그대로 사용한다.
또한 HP가 3COM의 인수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HP 브랜드만으로 데이터센터를 모두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HP ESSN 그룹은 엔터프라이즈 서버와 스토리지, 네트워크 솔루션을 모두 포함하는 ‘통합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HP가 강조하는 ‘컨버지드 인프라스트럭처(Converged Infrastructure)’를 위한 마지막 카드가 채워진 것이기도 하다.
제품만 아니라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한 업계 움직임은 지극정성 그 자체다. HP가 3COM을 인수해 네트워크 부분의 마지막 퍼즐을 맞춘 것과 마찬가지로, 네트워크 부분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시스코 또한 독자적인 서버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서버와 네트워크가 결합된 인프라 차원의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HP가 네트워크 제품군을 보강하면서 ‘시스코 프리 데이터센터’를 강조한 데는 이런 경쟁 관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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